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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필리핀 정부가 자국 철강 산업을 죽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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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필리핀 정부가 자국 철강 산업을 죽인 방법

필리핀 정부가 자국 철강 산업을 무너뜨렸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필리핀 정부가 자국 철강 산업을 무너뜨렸다. 사진=로이터
이 글은 필리핀 경제학자 앤드루 J. 마시건이 20일자(현지 시간) '비즈니스 월드'에 기고한 칼럼이다.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철강 기업을 건설하고, 자동차 산업을 가장 먼저 일으킨 주역이었는데 왜 지금은 나락에 빠졌는지 역사적 배경을 찾아내며 꼼꼼히 분석한 내용이다. '필리핀 정부가 철강 산업을 죽인 방법'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다.

철강 제조는 모든 경제의 산업화에서 기본이다. 필리핀은 민다나오 일리간 시에 철강 제조 공장을 건설한 아시아의 두 번째 국가이다. 필리핀 내셔널스틸이 그 주인공이다. 이 철강 공장은 필리핀의 급속한 산업화 발전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전성기 동안 내셔널스틸(NSC)은 필리핀 산업의 자부심이었다. 이 철강 기업은 필리핀에서 11번째로 큰 기업이었고 국영기업체 중에서 가장 빛나는 기업이었다. NSC는 수십억 달러의 수출을 통해 수익을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경공업이 번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필리핀은 NSC의 철강을 사용하여 아세안에서 자동차를 생산했던 최초 국가였다.

VW 사크바얀, 도요타 타마라우, 이스즈 하바라스, 미쓰비씨 시마론이 당시 필리핀에서 생산된 자동차들이다. 그리고 라디오웰스와 제니스라는 가전제품을 생산했었다. 그 밖에 지붕과 건축자재 그리고 가벼운 해양선박 등을 필리핀 국내에서 생산했다. 1960~1970년대 초반의 필리핀은 산업재 제조업체와 수출국으로서 한국과 대만의 도전자로 간주되었다.

NSC는 필리핀 산업의 세계적인 거인이자 선도적인 빛이 될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1999년 NSC가 문을 닫으면서 둔탁한 불협화음을 내며 중단되었다. 필리핀은 밀수, 정부지원 부족, 민영화와 관련된 잘못된 결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NSC를 잃었다. NSC의 폐쇄와 함께 필리핀 산업화는 큰 차질을 빚었다.

1950년 카를로스 가르시아 대통령의 필리핀 통치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 석유 자원이 많았던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와 달리 필리핀은 석유와 가스 수요량의 100%를 수입해야만 했다. 석유 수입은 필리핀의 외환보유고를 고갈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그러나 석유와 가스에서 부족한 부문은 철, 구리, 금, 니켈의 풍부한 자원으로 보상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가르시아 대통령은 급속한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광물 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산업을 기반으로 국가의 부(富)를 축적하고 석유 수입으로 발생한 마이너스 재정을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해 가르시아 대통령은 일리간 시에 국립조선소와 철강공사(NASCO)를 설립했다. 철강 생산량 중 가장 큰 수요처가 선박 부문이라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제철소와 조선 공장을 한 지붕 아래에 통합한 것이다. 당시 해상 선박수요는 물류, 운송, 군사, 어업 분야에서 엄청난 규모로 발생했다. 가르시아 대통령은 필리핀을 세계적인 해양력과 해양선박 공급 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
제철소는 해상 선박을 제조하고 지역 산업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는 강철 잉곳, 바, 봉강 그리고 시트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1955년 필리핀 정부는 NASCO에 선철 공장을 추가하기 위해 1500만 페소(약 3억3194만원) 대출을 승인했다. 이것은 NASCO를 통합 제철소에 더 가깝게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페소는 감가상각되었고 1500만 페소는 더 이상 선철 장비를 구입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58년 가르시아 대통령은 NASCO의 장비와 현대화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에 6250만 달러(약 849억원)의 대출을 신청했다.

미국 수출입은행은 두 가지 조건으로 대출을 승인했다. △모든 장비는 미국 공급업체로부터 구매하고 △NASCO의 최소 49%를 민간 부문에 판매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미국 수출입은행은 민간 부문의 참여가 운영 효율성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가르시아 대통령은 동의했고 NASCO의 주식은 4년 동안 지속된 길고 긴 장기간의 입찰 과정을 거쳤다. 결국 기업가 돈 페르난도 자신토(Don Fernando Jacinto)가 입찰에서 승리했다. NASCO는 일리건 일관제철소(IISMI)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때가 1962년이었다. 대출 수익금은 IISMI가 완전히 통합된 제철소로 되는 데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IISMI는 정부가 필리핀개발은행(DBP)을 통해 보증한 대출을 이용했다. 필리핀 정부는 열간 및 냉간 압연기를 설치하기 위해 추가로 3000만 페소(약 7억1130만원)의 대출을 승인했다.

현대화 프로그램은 1967년에 완료되었지만 사업은 어려웠다. 이미 대만과 한국으로부터의 철강 밀수가 만연했고 마르코스 이후 정부는 철강 제조 산업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철강 산업을 밀수로부터 보호하고 철강 제조업체에 관대한 재정 인센티브를 부여한 대만이나 한국 정부와 달리 마르코스 행정부는 IISMI에 동일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마르코스 시니어와 돈 페르난도 자신토는 IISMI와 정치적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IISMI는 1972년 세계 석유위기의 영향으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높은 전력비용 속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결국 정부에 위기 극복과 새 용광로 구입을 위한 7000만 달러(약 950억원)의 대출(또는 국가보증)을 요청했다. 마르코스 시니어는 대출 신청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페소는 더 하락했고 IISMI는 달러화 부채를 갚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제철소는 다시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DBP는 지원을 확대하는 대신 IISMI를 압류했다.

마르코스 정부는 계엄령으로 IISMI의 자산을 인수했다. 1974년에 이 회사는 국유화되어 내셔널스틸(NSC)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하면서 더 작은 철강 가공업체와 합병했다.

NSC는 빌렛, 주석 플레이트, 평판압연 제품을 전문으로 생산했다. NSC의 제품은 품질로 유명했으며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1980년 무역 개혁으로 철강 관세가 3%로 낮아졌다. 수입품이 시장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NSC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숱한 경쟁 속에서도 이익을 창출했다. 그러나 이익은 1980년대까지 꾸준히 감소했다.

1992년까지 NSC의 빌렛, 주석판 및 평판압연 제품 가격은 대만보다 비쌌다. NSC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공장을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기술을 주입해야 했다. 그러나 필리핀은 국가 자체의 부채 상환과 씨름하는 상황이어서 자원이 부족했다.

피델 라모스 대통령은 결국 NSC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낙찰자는 NSC의 시설을 현대화하고 철 가공으로 확장해야 했다.

우승자는 윙 틱 홀딩스(WTH)라는 말레이시아 회사였다. NSC를 WTH에 넘기는 것은 큰 실수였다. WTC는 제조 경험이 없는 철강 거래자였다. 그들은 이후 4년 동안 더듬거리며 1996년에 20억 페소(약 474억원)가 넘는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다. 그다음 WTH는 NSC를 WTH와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 다른 말레이시아 상인에게 매각했다. 손실은 더욱 증가했다. NSC는 마침내 재정적 출혈에 굴복하여 1999년에 문을 닫아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2003년 인도의 이스팟그룹이 제철소를 인수하면서 제철소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가르시아 대통령의 철강과 조선을 활용하는 급속한 산업화 비전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비난은 철강 밀수와 정부 지원 부족이라는 결과론으로 모아졌다. NSC를 노련한 제조업체가 아닌 상인에게 판매하기로 한 잘못된 결정이 가장 큰 실수였다.

사실 NSC는 필리핀을 고소득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산업화의 티켓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NSC의 스토리는 필리핀이 경제적 불황을 어떻게 자초했는지에 대한 또 다른 사례로 기록되었다.


김종대 글로벌철강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