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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숲속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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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숲속을 걸으며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숲길을 따라 걸었다. 장갑을 끼었음에도 손끝이 시려오고 귀가 얼얼할 만큼 바람이 차다.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숲의 공기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온몸이 떨려온다. 때로는 성가시고 귀찮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숲길을 걷는 이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잎을 모두 떨군 채 깊은 묵상에 잠긴 겨울나무들을 만나는 일도 즐겁지만 적요하기까지 한 숲의 고요 속을 거닐며 사색하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는 일이란 곧 걷는 일이라고 했다. 제아무리 교통수단이 발달해도 결국 인간의 삶은 걸으면서 시작되고 걸음이 멈춘 곳에서 끝이 난다. 그런 의미로 보면 걷는다는 것은 건강을 위한 운동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숲길을 걷다 보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의 속삭임처럼 삶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자연에 대한 안목이 없던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꽃 피지 않는 나무라 해도 해거리 중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베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는 해거리란 말조차 생소했던 터라 아버지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막연히 나무를 사랑하는 말씀이겠거니 짐작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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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잎을 떨군 나무들이 대부분인 겨울 숲에서는 개개의 나무들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벌거벗은 채로 북풍한설을 견디고 있는 나무들은 그 나무가 그 나무 같고, 심지어는 죽은 나무인지 산 나무인지 분간조차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겨울 숲의 나무는 아는 이만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봄이면 새순이 돋고, 여름에는 열매를 맺고, 가을에는 열매가 익고, 겨울에는 잎과 열매가 떨어지고 나뭇가지로 찬바람을 견디며 다시 봄을 기다리는 한살이 과정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겨울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겨울에 나무는 잎이 없어 나무의 수형이나 수피(樹皮), 겨울눈이나 잎이 달린 흔적이나 통기조직 등을 관찰하기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특히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나무들이 달고 있는 겨울눈을 보면 살아 있는 자연과 그 자연의 신비로움에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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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진 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군데군데 돌기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겨울 눈이다. 눈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 막 터져 돋아나려는 식물의 싹'을 일컫는다. 새봄에 가지를 올리고 새로운 꽃이 되고 잎이 되는 미래가 바로 겨울눈이라 할 수 있다. 작고 앙증맞은 겨울눈은 나무마다 생김새도 다르다. 이 겨울눈은 나무에 있어 가장 어리고 연한 조직이지만 비늘이나 털로 단단히 덮여 있어서 추위에도 얼지 않고 거뜬히 겨울을 난다.

재미있는 것은 눈의 껍질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백목련처럼 회색빛 털코트를 입은 겨울눈도 있고, 물푸레나무처럼 검은색에 가까운 가죽 코트를 입은 겨울눈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겨울눈은 겨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인 여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늦가을에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다음 해에 새 줄기가 되고, 잎이 되고, 꽃이 될 겨울눈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지혜가 겨울눈 속에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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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은 우연한 요행의 산물이지만 행복은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네 삶도 사계절만큼이나 변화무쌍하지만 희망은 힘든 시간을 어떻게 준비하고 견디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면 겨울 숲을 거닐며 묵묵히 추위를 견디는 나무들과 나뭇가지 끝에서 새봄의 희망을 간직한 겨울눈의 지혜를 생각해 볼 일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