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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12월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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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12월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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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마침내 12월이다. 달랑 한 장, 마지막 잎새 같은 12월의 달력은 낙엽처럼 흩어진 세월과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의 갈피를 뒤적이게 한다. 조심스레 일상으로의 회귀를 꿈꾸던 위드코로나도 오미크론의 공포 속에 멈춰버린 올 겨울은 유난히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희망을 다짐하기에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살을 에는 찬바람보다 더 엄혹하다. “…/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 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고 한 황지우의 ‘12월’이 우리가 마주한 세상이 처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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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이 쓴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 숲 간)에는 인도 사람들의 12월 관습이 소개돼 있다. 불교만큼의 역사를 지닌 ‘자이나교’의 종교 의례다. 그들에겐 1년에 한 차례 ‘용서의 날’이 있어 한 해를 돌아보면서 땅과 공기, 물과 불, 동물과 사람, 식물 등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해를 끼친 행위를 낱낱이 반성하며 단식을 한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편지를 써서 용서를 구한다. 그들만큼은 아니라도 차분히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성찰하고 마무리를 하는 달이건만 올 12월은 시절이 하 수상하니 그마저도 쉽지 않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삶이 무료해지면 나는 곧잘 숲을 산책한다. 작은 배낭 하나 둘러메고 숲을 향해 걷다 보면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가슴을 짓누르던 우울감도 사라지고 뺨을 스치는 쌩한 찬바람에 씻긴 듯 머리가 맑아진다. 북한산 둘레길 들머리에서 만난 화살나무 빨간 열매가 눈을 찔러온다. 나도 한때 화살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 속 붉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다. 번번이 빗나가기 일쑤였지만 막무가내로 과녁을 향해 날아가던 순진무구의 직진성은 젊은 날의 혈기였을까. 나이 들수록 자주 멈칫거린다. 오랜 날을 살아온 연륜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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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서면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숲의 고요를 흔들어 깨운다. 내 발소리에 스스로 놀라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운데, 그런 나를 들고양이 한 마리가 상수리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고 있다. 그 눈길이 두렵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위로가 된다. 이 적막한 겨울 숲에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여전히 숲속엔 수많은 생명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혼자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은 나 역시 별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굴참나무의 수피를 쓰다듬다가 낙엽 위로 초록 잎을 내밀고 있는 맥문동과 원추리를 본다. 이미 겨울빛이 가득 들어찬 12월의 숲이지만 눈여겨보면 군데군데 초록이 남아 있다. 몇 장의 초록 잎을 달고 있는 국수나무도 보이고 계곡의 바위를 덮고 있는 이끼도 파랗다.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이름 모를 로제트 식물들과 양지바른 곳의 애기똥풀도 아직 초록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아 이 계절에 어울리는 황지우의 ‘12월의 숲’이란 시를 찾아 입속에 넣고 웅얼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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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맞는 겨울나무 숲은/ 목탄화(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 숲은/ 성자(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듯/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고/ 겨울나무 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버리고/ 인근 산의 적설량(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 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황지우의 시 ‘12월의 숲’ 일부)

너나없이 모두가 힘든 시절이다. 굳이 희망을 얘기하기보다 숲속의 나무들처럼 서로 어울려 묵묵히 버티다 보면 또 한 해가 가고,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