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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결로 빚은 우주…'어느 화가의 이야기, 박종용'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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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결로 빚은 우주…'어느 화가의 이야기, 박종용'展

박종용 '결의단청', 259x193, 2021이미지 확대보기
박종용 '결의단청', 259x193, 2021
떠도는 돌로 집을 지었지요/ 망개 붉은 열매가 익을 때까지/ 편으로 자르고 잇고 붙여 만든 집/ 나를 위한 집이 아니었답니다/ 원하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곳이랍니다/ 지난 한가람에서도 세종의 집에서도/ 나의 땀내 나는 작업을 보셨겠지요/ 나의 상상이 여러분의 자랑이 되었으면 해요/ 나의 원(圓)이 여러분의 원(願)과 만나/ 광화문 이 자리에서 믿음의 꽃을 피웠으면 해요/ 빗살 무늬 틈에서 빛나는 성모마리아나/ 결의 정원에서 괘불을 만나보세요.

박종용 화백의 광화문 주홍빛 가을 이야기가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어수선한 공사판 곁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이름만 들어도 주눅이 들 정도의 대가들의 예작(藝作)들이 대궐처럼 버티고 있다. ‘어느 컬렉터의 이야기 : 정상림’이 시작된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떠오른다. 검사 정상림과 화가 박종용의 관계는 서정성을 바탕에 둔다. 검사의 안목과 화가의 눈이 만나 서치라이트가 되어 수집한 작품들이 박종용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었다.
박종용 '결의 빛', 259x193, 2021이미지 확대보기
박종용 '결의 빛', 259x193, 2021
박종용 '결의 빛', 259x193, 2021이미지 확대보기
박종용 '결의 빛', 259x193, 2021


‘어느 컬렉터의 이야기’는 인물(7명), 자연(12명), 새로움(9명), 다양성(9명)에 걸친 네 개의 에피소드를 담는다. ‘인물을 그리다’(이수억, 장이석, 박영선, 임직순, 최영림, 김흥수, 남관), ‘자연을 담다’(김두환, 박상옥, 최예태, 김원, 오지호, 천칠봉, 권옥연, 변종하, 윤중식, 이림, 김영덕, 이득찬), ‘새로움을 시도하다’(전혁림, 김환기, 윤형근, 하인두, 류경채, 표승현, 이우환, 이응노, 김훈), ‘다양함을 확장하다’(이숙자, 최병소, 이두식, 신성희, 박영하, 이배, 오치균, 강익중, 문서진)로 갈래를 지은 작품들은 아련한 향수와 사연을 담고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느 화가의 이야기 : 박종용」을 맞으려면 1층에 닿아야 한다. 감동과 감탄이 일어나는 곳이다. 흑백으로 구성된 대작들, 순백의 예작들, 단청과 오방이 응용된 작품들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복잡한 척도법을 떠나보내고 100호짜리 네 개로 구성된 400호짜리 ‘결의 빛’이 혼절과 기절에 이를 정도의 상상의 빛을 피워낸다. 캔버스에 고령토, 마대, 아교, 석채로 창작된 압도적인 작품 이면(裏面)을 헤아리다 보면 시린 ‘겨울 이야기’가 스며든다.
박종용 '조각 나무', 130x130, 2021이미지 확대보기
박종용 '조각 나무', 130x130, 2021

박종용 '조각 쇠', 130x130, 2021이미지 확대보기
박종용 '조각 쇠', 130x130, 2021


박 화백이 작품을 해나가는 과정은 미켈란젤로를 닮은 종교적 헌신과 맥을 같이 한다. 빛이 결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풀어내며 내공을 쌓아가는 과정은 종교적 인내가 필요했다. 작가의 이야기는 과거에 기반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무척 도회적이다. 작품마다 건물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도면을 배치한다. 박 화백은 400호 1점, 200호 12점, 100호 22점, 60호 2점, 옛날 작품 1점(부엉이 그림), 병풍 1점, 조각 2점에 이르는 총 41점을 선보였다.

전후의 어린 시절부터 궁핍을 알아버린 뒤, 식솔이 여럿 달린 함안의 선생님 댁에서도 호구지책이 어려워지자 작가는 붓의 힘으로 밥벌이를 생각해내고 상경할 수밖에 없었던 선량한 천재 화가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화작(畵作)을 하며 화전(畵田)을 일구었다. 부루주아지가 점령한 화단의 풍토로 미루어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고, 이름있는 단체의 상을 받는다는 것이 사치라는 것을 깨닫고는 박 화백은 이름 없는 풀잎이 되어 군중의 숲으로 숨어들었다.
환갑이 지난 시점에도 박 화백은 여전히 화업에 정진하며 백담사를 낀 인제의 백공 미술관에서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동양화를 통달하고, 마대·고령토·아교로 막대한 시간과 탁월한 기교로 원(圓)을 일구며 우주원(宇宙圓)을 만들어나갔다. 그의 삶은 종교적 순교에 가까웠다. 그가 그려나가는 점액질의 원은 화평을 간구하는 평화의 원이다. 무수한 염원을 담은 작품들은 돌고 도는 세상사와 순리를 깨우치는 만다라이거나 순백의 극락정토가 되기도 한다.
박종용 '결', 130x162
박종용 '결', 130x162

박종용 '결', 194x259
박종용 '결', 194x259


박종용의 편(片)은 나눔이 아닌 화합과 화평의 편(구성원)이다. 그의 원은 춤을 춘다. 원무(圓舞)이다. 원은 물살처럼 퍼져나가고, 수의 확장을 가져온다. 무수한 순백의 원은 경전의 필사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하나를 놓치면 다시 작업해야 하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박 화백은 수직의 대칭과 수평적 공평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세상을 아우르는 대범함을 소지한다. 서양적 터치에서 한국적 정서를 듬뿍 담은 모양새는 단청이나 오방색을 그리워함에서 나타난다.

박 화백은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석채를 가져와 가늘게 때론 굵게 수직과 수평의 결에 붙이기도 하고, 네 귀퉁이에다 편자를 심듯 남색, 노랑, 파랑, 주홍으로 채색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보여야만 제대로 파악되는 그의 작업, 세상을 백색으로만 정화할 수 없음에 현대화를 시도한 것임이 틀림없다. 전통에서 찾은 빛깔은 예상 이외의 화려한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명도를 살리고 색 대비를 시도하면서 대중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득작업에 나선 것이다.
박종용 '결(빛)', 259x194
박종용 '결(빛)', 259x194


내설악 백공 미술관장 화운당 박종용, 지난 8월 지긋한 나이에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비구상 부문 대상을 수상한 서양화가이다. 무명의 화가로 백공(白空)에 이르고자 했지만, 그의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세인들의 부름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업은 평상시처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세종 컬렉터스토리, 컬렉터 정상림과 화가 박종용의 가을 이야기는 잊지 못할 감동을 남기고 28일(일) 무궁 영화로 가는 겨울 마차를 탈 것이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