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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 반성도 사죄도 없이 떠났다…'역사의 단죄' 받은 정치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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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 반성도 사죄도 없이 떠났다…'역사의 단죄' 받은 정치군인

육사 졸업 후 정치군인의 길…12·12, 5·18로 권력 장악
퇴임 후 끝없는 추락…광주의 진실 끝내 외면·추징금 납부도 거부
집권시 경제성장, 스포츠·문화 발전 두고도 비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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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 18일 최규하 전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를 떠나기 전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과 인사하는 모습. 사진=연합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시대적 상황이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냈다"(2017년 회고록)고 주장했지만, 현대사에선 '대통령 전두환'이 아닌 민주주의를 짓밟은 정치군인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육사 졸업 후 정치군인의 길로…12·12쿠데타, 5·17조치로 정권 찬탈

그는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사(11기)에 들어가면서 엘리트 군인 코스를 밟았다.

대통령직을 물려주었음에도 백담사 유배를 떠나게 한 동기생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 만남'도 육사에서 시작됐다.

육사 시절 동기생 사이에서 보스 역할을 자청하고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육사 후배들의 쿠데타 지지 거리 행진을 주도하는 등 권력욕이 남달랐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1955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 제1공수특전단장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58년 육군 장군이었던 이규동 씨의 차녀 이순자 씨와 결혼했다.

영남 출신 육사 동기와 후배를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19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정희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권력 중심에 바짝 다가서게 된다.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오른 그는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서거하자 권력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그는 각종 월권행위로 군내 비판이 일면서 교체 위기에 몰리자 하나회 장교들과 군사반란을 도모했다.

그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내란 방조 혐의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고 전방 육군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켜 군 지휘체계를 무너트리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군의 실권을 장악한 뒤 하나회 출신으로 군부를 재편한 그는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金)을 정치규제로 묶고 권력을 일거에 장악했다.

5·17 조치 다음날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며 거리에 몰려나와 저항했으나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 유혈 진압을 감행하며 현대사 최대의 비극을 낳았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전씨는 1980년 6월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 데 이어 국회를 해산시킴으로써 대통령 권좌를 확보했다.

같은 해 8월 대장 계급으로 군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5공 독재 정권의 서막이었다. 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뒤 그해 유신헌법에서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7년 독재 후 육사 동기생에 정권 이양
5공 헌법을 만들고 1981년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비리·부패·정쟁의 일소를 부르짖었다. 정권의 구호는 '정의사회 구현'이었지만 나라 전체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언론 통폐합 조치와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에 재갈을 물렸고 학원가에는 안기부와 보안사 요원들을 풀어 학생들을 감시했다.

야당 인사와 학생들은 친북 용공 혐의가 씌워져 모진 고문을 당했다. 기업인들을 겁박, 통치자금을 조성해 부정축재를 일삼았고, 권력자들과의 친분을 축재에 이용한 '장영자 사건' 등 집권기 내내 각종 금융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독재 정권을 무너트린 건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이었다. 1987년 1월 서울 서빙고 대공분실에 연행된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로 덮으려 한 경찰의 발표는 6월 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을 불렀다.

전씨는 4·13 호헌조치로 5공 연장을 획책했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굴복, 권력의 정점에서 떨어지게 된다.

전씨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 선언으로 여론이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조성된 상황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에 힘입어 6공화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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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사진=연합

퇴임 한 달만에 동생 전경환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등 여소야대 지형에서 5공 청산의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며 끝없는 추락을 맛보게 된다.

1988년 11월 재임 기간 과오와 비리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정치자금 139억원과 개인재산 23억원 등 재산을 헌납한 뒤 이순자씨와 함께 강원도 백담사 유배 길에 올랐다.

백담사로 향한 11월23일은 공교롭게도 전씨가 숨진 날이기도 하다.

백담사 유배 중 1989년 12월 31일 야권의 요구에 국회 광주특위와 5공특위 합동회의에 출석, 증언대에 서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장에서 그에게 명패를 집어 던진 장면은 5공 청산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았다.
1990년 12월 백담사에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역사의 단죄였다.

문민정부를 연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와 12·12, 5·18 진상규명 및 관련자 처벌 등 과거사 청산 조치에 따라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1995년 12월 내란죄 혐의로 검찰의 출두 통보를 받은 전씨는 연희동 자택 앞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골목길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가 또 한번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곧바로 사전구속영장이 집행돼 고향 땅에서 압송된 그는 한겨울 4평 남짓한 차디찬 교도소 독방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2.12쿠데타를 주도한 지 16년만에 이뤄진 심판이었다.

그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한 1997년 12월 대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구속 2년 만에 풀려났지만 이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하지 않았다.

"돈이 없다"며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회고록과 재판을 통해 광주의 진실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서울올림픽 개최, 물가안정 등 경제성장 두고 양론

전두환 정권은 물가안정 등 경제성장 기조를 유지했고 88하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고 전씨측은 자체 평가한다.

장기집권을 획책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달리 7년 단임 약속을 지켰다는 점도 전씨가 내세우는 '치적' 중 하나다.
그는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부를 평화적으로 후임에게 이양한 것은 우리 현대 정치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당장 경제성장을 두고도 "박정희가 차려놓은 밥상 위의 밥을 먹은 것"이라는 반론이 적지 않다. 통치자금 명목으로 수출 대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재산을 끌어모은 점도 전두환 정권이 경제성장에 공을 들였다는 평가를 무색케 한다.
프로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영화 등 소프트 분야 발전에 나름 공을 들였다고 하지만 '3S(스포츠·섹스·스크린) 정권'이란 말이 따라붙는 것에서 보듯, 문화를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해 민주화 열망을 꺾는 우민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