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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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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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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일찍 찾아든 추위에 몸보다 먼저 마음이 움츠러드는 요즘이다. 활엽수들은 곱게 물든 이파리를 자랑할 틈도 없이 찬바람에 서둘러 잎을 내려놓는다. 찬란한 새봄을 맞이하기 위한 나무들의 겨울 준비는 남김없이 비우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낙엽귀근(落葉歸根). 잎은 떨어져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흙에 보답이라도 하듯 나무는 곱게 물든 이파리들을 모두 떨구어 대지를 덮어주고 알몸으로 찬바람을 견디며 겨울을 나는 것이다.

찬바람에 손끝이 시려오는 아침 산책길에서 민들레를 만났다. 바람 없어도 우수수 잎이 지고, 꽃보다는 열매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겨울 들머리에서 민들레꽃을 보다니!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운 민들레를 보니 생명에 대한 외경심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겨울 들판에서/ 노란 민들레를 만났습니다// 누군가 흘리고 간/ 황금빛 단추 같은/ 민들레 꽃// 세상의 모든 꽃/ 사라진 겨울 들판에/ 홀로 피어 찬바람에 흔들립니다// 찬바람에도 굴 하지 않고/ 눈부신 꽃을 피운/ 겨울 민들레// 한 줌 햇볕만 있어도/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게 삶이라고/ 가만가만 나를 타이릅니다” 어느 해 겨울, 서해안 트레킹을 하던 중 들길에서 민들레꽃을 보고 썼던 나의 졸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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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모두에게 힘든 계절이다. 동물들이 해마다 겨울이면 따뜻한 곳으로 서식지를 옮기거나 겨울잠을 자며 추위를 견디듯, 식물들의 겨울나기도 다양하다. 목련이나 동백은 겨울눈으로 추위를 버티고, 나팔꽃이나 채송화 등 한해살이풀들은 말라죽기 전에 씨앗을 흩뿌려 이듬해에 새로운 생을 이어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같은 풀이면서도 겨우내 말라 죽지 않고 버텨내는 풀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질긴 생명력의 대명사로 불리는 민들레다.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민들레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 대개 4∼5월께 꽃을 피우지만, 늦가을이나 초겨울에도 꽃을 피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는 약 한 세기 전에 귀화한 유럽 원산의 서양민들레란 사실이다.

토종 민들레와 서양민들레는 꽃의 모양과 색이 비슷해 구별이 쉽지 않은데 꽃받침의 모양이 다르다. 토종 민들레의 꽃받침은 위쪽으로 솟아있고, 서양민들레의 꽃받침은 아래쪽으로 동그랗게 말려 처져 있다. 꽃받침까지 세세히 들여다보며 꽃을 구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민들레꽃을 보고 잠깐이라도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민들레는 아마 흐뭇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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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냉이, 달맞이꽃, 엉겅퀴, 꽃마리, 뽀리뱅이 등과 더불어 ‘로제트 식물(rosette plant·방석식물·근생엽)’에 속한다. 로제트 식물이란 뿌리에서 직접 나온 잎이 바닥에 들러붙어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 모양이 장미꽃을 닮아 그리 불린다.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찬바람을 피하고, 잎을 사방으로 펼쳐 햇빛을 최대한으로 받는 것이다. 또한 땅에 밀착하면 지열을 이용하여 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로제트 식물이 가을에 싹을 내어 추운겨울을 이렇게 힘겹게 견디는 것은 봄이 오면 누구보다 먼저 꽃을 피워 꽃가루받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 다. 번식력이 강한 로제트 식물 대부분은 1년에 두 번 이상 꽃을 피워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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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추운 겨울이 없다면 다른 풀들도 죽지 않고 살아서 애초에 경쟁을 피해 남들보다 먼저 꽃가루받이를 하려던 로제트 식물의 전략은 무위에 그칠 것이다. 일찍 찾아든 추위에 꽃의 소멸이 아쉽다면 주변 화단을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장미꽃 모양으로 초록색 잎을 펼친 로제트 식물이 눈에 띌 것이다. 운이 좋으면 겨울 민들레를 만날 수도 있다. 참, 민들레의 꽃말은 ‘감사의 마음’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