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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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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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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며칠 전 고향에 있는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코로나 때문에 올 추석엔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전갈이었다. 급기야 코로나19가 추석 귀향길마저 막아 버린 것이다. “얘들아 올 추석엔 내려오지 말거라. … 힘들게 내려와서 전 부치지 말고 용돈이나 두 배로 부쳐다오.” 정부에서 앞장서서 고향방문 자제를 홍보하고, 사람들 역시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에 고향으로 향하던 마음을 접는 눈치다. 얼마 전 벌초를 할 때만 해도 별 이야기가 없어서 고향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참이었는데 막상 전화를 받고 보니 마음 한 구석이 휑하다.

이문열의 중편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그래서 잃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별사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걸 대하면 ",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구나" 싶은 사물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이십 리 밖에서도 보이는 고향의 가장 높은 봉우리일 수도 있고, 협곡의 거친 암벽 또는 동구 밖 노송일 수도 있다. 그리워하던 이들의 무심한 얼굴, 지서 뒤 미류나무 위의 까치집이나 솔잎 때는 연기의 매캐한 내음일 수도.” -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中 일부 - 유년의 기억 속에 자리한 아름다운 고향은 세월 속에 어쩔 수 없이 색이 바래지고 점점 시간의 지층 속에 묻혀 화석이 되어간다. 그렇게 희미해진 기억들을 다시 돋을새김해 주는 계기가 추석 귀향길인데 올해는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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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정직한 길이었다. 선산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마른 기침소리가 여전히 울리는 듯하고 그리움 가득한 어머니의 선한 눈빛이 선연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을 타는 코스모스의 춤사위 너머로 들판엔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벼이삭들이 수런거리고 뒷동산엔 밤송이들이 알밤을 쏟아내던 고향의 품은 도회지의 꿈을 좇아 고향을 떠나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지치고 고단한, 상처받은 삶을 따뜻이 품어주기에 넉넉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 남자들은 밤을 까고 여자들은 전을 부치면 집안에 가득한 기름 냄새만큼이나 가족 간의 정이 흘러 넘쳤다. 생각만으로도 마음 흐뭇해지는 고향의 정경이 눈에 밟혀온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잠시나마 도회지의 욕망을 내려놓는 성찰의 시간이자 잃어버린 유년의 순수를 찾아가는 도회지의 때에 절었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는 시간이다. 동구 안으로 들어서면 고향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정겹고 사랑스럽다. 이문열이 말한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나를 스치는 바람, 흙내음, 햇빛까지도 도회지의 그것과는 다르게 살갑게 다가온다. 고향집 뒤의 감나무와 집 앞의 개울가 호두나무, 대추나, 뒷동산의 밤나무까지 어느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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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를 지내고 성묘까지 마치고 나면 한나절이 겨웁기 십상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면 나는 습관처럼 홀로 뒷동산에 올라 호젓한 숲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심은 이깔나무와 나무 사이를 거닐며 나무들의 수피를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쑥부쟁이나 개미취 같은 들꽃에게 말을 걸기도 하며 세상과의 불화로 강퍅해진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고향의 꽃향기, 풀 향기, 나무 향기에 취하다 보면 날선 마음도 유순해지고 어느덧 거친 세상과 다시 맞설 자신감이 생긴다.

코로나19가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곱절로 짙어졌다. 비록 이번 추석엔 고향에 가지 못하지만 고향에 대한 정은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다. 사회적 거리는 2미터이지만 마음의 거리는 0미터 아니던가. 비록 고향엔 가지 못한다 해도 가까운 숲이라도 찾아 푸근한 고향의 향기를 느껴보시라 강권한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