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은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났던 조선을 대표하는 예인(藝人)으로 꼽힌다. 그중에도 풀벌레 그림을 그려 여름 볕에 말리려 내놓자 닭이 산 풀벌레인 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그림엔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런 신사임당이 접시꽃을 잘못 그렸을 리는 만무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그림 속의 꽃이 황촉규화로도 불리는 닥풀꽃이란 걸 알고서야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한방에서는 꽃을 황촉규화, 뿌리를 황촉규근, 열매를 황촉규자라 하여 약재로 사용한다. 황촉규화는 통증 때문에 소변을 잘 못 보는 증세를 치료하고, 황촉규근은 볼거리나 종기 등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황촉규자는 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타박상에 가루를 내어 술에 타서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약재로도 쓰임새가 많지만 귀화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닥풀을 재배해 온 것은 한지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닥풀이란 이름도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 때 점액질이 많은 닥풀 뿌리를 풀감으로 사용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견오백(絹五百) 지천년(紙千年)이란 말이 있다. 비단은 오백년, 한지는 천년을 간다는 뜻으로 우리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내세울 때 즐겨 쓰는 말이다. 한지를 연구해 온 전문가들에 의하면 천년을 가는 한지의 비밀이 닥나무와 이 닥풀에 있다고 한다. 닥풀 뿌리의 점액질은 한지를 만들 때 지통에서 닥나무의 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게 하고 물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도와주어 우수한 한지를 만들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약재나 한지 만드는 데 중요한 재료가 아니라 해도 닥풀꽃은 관상용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꽃이다. 쪽빛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산들바람을 타고 있는 닥풀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일상의 번잡함이 한순간 사라지고 마음이 한껏 여유로워진다. 얼핏 보면 부용꽃 같기도 하고, 접시꽃을 닮은 것도 같은 닥풀꽃. 일찍이 나태주 시인은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이라고 노래했다. 이름을 모른다 해서 꽃의 아름다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을 알면 꽃은 훨씬 살갑게 다가와 자신의 향기를 건네올 것은 분명하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