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는 내달 6일까지 전주영화제 출품 영화와 해외 초청작 등 총 97편을 서비스한다고 28일 밝혔다. 상영작은 작품 별 구매 후 관람할 수 있다. 장편영화와 한국 단편영화(묶음 상영)는 7000원, 해외 단편영화(1편)는 2000원에 제공한다.
웨이브 관계자는 "프로그래머가 영화를 선별하는 작업은 영화제 성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라면서 "해당 추천작을 통해 올해 21회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가 가진 고유한 색깔과 시각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 문석 프로그래머 추천작
◇ 보드랍게 / 박문칠
한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가. 다큐멘터리 <보드랍게>가 조명하는 인물 김순악의 인생도 그러하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았던 김순악은 해방 이후 생존의 궁지에 몰려 유곽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미군 기지촌에서 ‘색시 장사’도 했으며, 미군에서 나온 물건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전주국제영화제와 깊은 인연을 가진 박문칠 감독은 한 인물을 성스럽게 포장하거나 박제화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경북 사투리로 김순악의 증언을 낭독한다거나 애니메이션, 아카이브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등 연출의 세공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 저승보다 낯선 / 여균동
여균동 감독의 <저승보다 낯선>은 전작 <예수보다 낯선>(2018)에 이은 ‘낯선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다. 전작에서처럼 여 감독 스스로 주인공 ‘감독’ 역할로 출연한다. 그의 육신은 병원 중환자실에 있지만 영혼, 또는 정신은 텅 빈 벌판을 돌아다닌다. 그는 떠들썩한 현실 세계보다 고요한 이곳이 좋지만 어느 날 비슷한 처지인 ‘놈’을 만나면서 그의 평화는 깨진다. 놈은 감독을 쫓아다니며 수많은 질문을 퍼붓고 시시콜콜 말을 건다. 사실상 2인극인 이 영화는 두 사람의 끝없는 대화만으로 전개됨에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균동 감독뿐 아니라 상대역인 주민진의 연기 내공 또한 만만치 않은 덕분이다.
◇ 비디오 포비아 / 미야자키 다이스케
오사카 한인촌에 사는 젊은 여성 아이는 배우를 꿈꾸며 연기학원을 다니고 있다. 학원생들과 술을 마시고 클럽에 간 아이는 한 남자를 만나 그의 집으로 가고, 다음날 자신의 섹스 장면이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비디오포비아>는 N번방 성착취 사건이 벌어지는 이 시대를 비춘다. 이날 이후 아이는 정신적으로 불안해지고 편집증 비슷한 증상은 갈수록 심해진다. 하지만 경찰을 포함해 아이의 문제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가 연기학원에서 수업하는 입센의 <유령> 속 알빙 부인처럼, 아이는 정신적 공황에 휘말린다. 표현주의적 흑백 화면도 긴장감을 더한다.
◇ 양치기 여성과 일곱 노래 / 푸시펜드라 싱
아름다운 여성 라일라는 가부장제 사회의 전통에 따라 탄비르라는 남성의 아내가 돼 카슈미르 지방으로 이주한다. 정치적 분쟁 탓에 경찰과 군인의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는 이곳에서 그녀의 등장은 큰 관심을 모으고, 한 경찰 간부는 그녀를 성적으로 정복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14세기 카슈미르 시인 랄레슈와리의 시를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는 주관이 뚜렷하고 현명한 라일라가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일라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페미니스트에 다름 아니다. 히말라야 산악 지대의 아름다운 풍광과 결혼, 이주, 유혹 같은 주제를 담은 일곱 개의 전통 민요 또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 문성경 프로그래머 추천작
◇ 이사벨라 / 마티아스 피녜이로
인생에서 성공은 재능의 결과일까, 의지와 욕망의 문제일까, 혹은 자기 확신이 결정하는 걸까? <이사벨라>는 셰익스피어 고전 속 인물을 매개로 동시대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해 온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희곡 연작, 그 다섯 번째 작품이다. 마리에는 연극 <자에는 자로 MEASURE BY MEASURE>의 이사벨라 역 오디션을 준비 중이다. 그는 돈이 급해 한동안 연락을 끊었던 형제를 다시 찾고 그 과정에서 그의 애인 루시아나와 만난다. 그런데 둘은 같은 오디션을 준비 중임을 알게 되고, 함께 대사와 움직임을 연습한다. 1년 뒤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만난 그들은 각자의 결심이 만들어낸 행동의 결과를 나눈다. 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야기는 인생의 색을 맞추는 퍼즐처럼 펼쳐진다.
◇ 이상한 나라의 펠릭스 / 마리 로지에
펠릭스 쿠빈은 악기 중 신시사이저 Korg MS-20을 가장 좋아하는 실험 음악가다. 펠릭스는 삶의 어떤 순간에도 음악 창작을 멈추지 않으며, 아이 같은 상상력으로 모든 소리의 변형 가능성을 찾는 인물이다. 마리 로지에 감독은 전작들에서 젠더를 바꾸고 싶어 하는 음악가, 게이 레슬러 등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왔다. 이번 신작은 펠릭스라는 독특한 인물이 가진 끝없는 창작열을 통해 전자음악에서부터 라디오, 팝, 오페라, 콘크리트 음악, 마이크 실험까지 관객을 순수한 음악 세계로 안내한다.
◇ 플레이 백 / 아구스티나 코메디
오랜 독재정권이 끝난 1983년, 민주주의와 함께 VHS 기술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플레이백>은 VHS로 촬영된 오래전 기록을 재구성해 트랜스젠더와 드랙퀸 그룹에서 활동하던 인물, 라델피(La Delpi)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파운드 푸티지 다큐는 80~90년대 언더그라운드 쇼에서 활동하던 이들의 교류 속에서 행복한 동시에 끔찍했던 순간들을 드러내며, 두려움과 억압이 지배하던 사회에 저항의 한 형태이자, 존재의 행복을 드러내는 형식으로써의 트랜스 쇼를 보여준다. 이 빛나는 에세이 영화는 작고한 트렌스젠더들과 VHS 시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다.
◇ 매기의 농장 / 제임스 베닝
전설적인 감독이자 지칠 줄 모르는 창작자인 제임스 베닝은 이번 신작에서도 그의 관찰적 영화 스타일을 지속한다. 그동안 기차, 길, 세계의 다양한 풍경, 끝없는 공간과 상황에 시선을 둔 그는 이번에는 자신이 교수로 몸담고 있는 캘리포니아예술대학(CalArts)에 주목했다. 고정 숏으로 학교 주변의 일련의 자연과 건물 내·외부를 관찰한 이미지에는 공공기관의 반듯함과 함께 초라한 구석도 포함돼 있다. 제임스 베닝은 독특한 감각으로 시각과 시간을 사용하는데, 학교의 이미지를 잘게 나누어 응시하는 동안 학교 내 복도 어딘가에서 영화 제목에 영감을 준 밥 딜런의 동명의 노래 ‘매기의 농장’이 들려온다.
■ 전진수 프로그래머 추천작
◇ 블라인드 / 페르난도 수베르
후안은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시각 장애인 아버지 마르코와 함께 할머니 댁으로 향하지만 할머니는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후안은 그렇게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에서 며칠을 머무르게 되고, 사촌을 비롯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두 사람은 예기치 않은 갈등을 겪는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시력을 잃은 아버지에게는 전쟁의 상처마저 있다. 결국 외갓집에서 보낸 여름날의 며칠은 열세 살 소년 후안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고,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치유의 여행’이 된다.
◇ 오로슬란 / 마트야즈 이바니신
헝가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 마을 사람들은 늘 그렇듯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민 오로슬란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사망 소식은 순식간에 작은 마을 안에 퍼진다. 슬픔에 잠긴 마을 사람들은 오로슬란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나누며 서서히 슬픔을 극복하고, 그들의 이야기로 재구성된 오로슬란의 삶을 돌아본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마트야즈 이바니신 감독은 어쩌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이야기를 느린 화면, 풍경화를 보는 것 같은 구성, 다큐멘터리 같은 주민들의 일상 등을 비추며 더욱 단순하게 연출해 보여준다. ‘기억과 치유’에 대한 고요한 명상록 같은 작품이다.
◇ 관습의 폭력성 / 키르시카 사리, 엘리 토이보니에미, 안나 파빌라이넨, 알리 하파살로, 레타 알토, 옌니 토이보니에미, 미아 테르보
한국 사회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킨 ‘미투 운동’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관습’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과 불평등한 시선이 여전히 만연하고, 또 그에 대한 처벌은 관대하기만 하다. 일곱 명의 핀란드 여성 감독은 이와 같은 나쁜 관습에 맞서 <관습의 폭력성>을 만들었다. 카메라는 여섯 명의 여성을 각각 담아내며 이들이 길거리나 직장, 술집, 법원, 심지어 연극 무대에서 받는 다양한 고통을 보여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전되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상품화, 그리고 폭력과 같은 잘못된 관습들은 대체 언제쯤이나 사라질 수 있을까.
한현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kamsa091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