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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정월 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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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정월 대보름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하늘 높이 떠오른 달이 온 세상을 훤히 비추는 정월 대보름 밤, 달을 보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을 때 김용택의 시가 생각났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도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전화 한 통화에 마음이 달떠서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까지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힘이다. 시 속엔 아름답고 빛나는 것을 보고 제일 먼저 자신을 떠올려준 상대에 대한 고마움이 짙게 배어 있다. 사람을 가장 신나고 힘이 나게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고 있다는 믿음이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 모여 살게 되면서 도시의 휘황한 불빛에 가려 달빛도 그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이 되면 나는 습관처럼 추억에 잠겨 달을 바라보게 된다. 이젠 설날도 예전 같지 않아 고향을 찾아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는 모습도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오히려 연휴를 이용해 유명 관광지나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예전에는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명절 분위기가 이어졌다. 집안 어른뿐만 아니라 타성바지 어른들께도 세배를 다니기도 했다. 남자들은 모이면 윷놀이를 하고, 여자들은 마당에서 널뛰기를 했다. 아이들은 들판을 뛰어다니며 연을 날리고 정월 대보름이면 어른들은 달집을 태우며 가족들의 안녕을 빌었다.
이제는 아득한 옛일처럼 되어버렸지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 좋은 추억이다. 늙은 살구나무가 있던 뒤란의 장독대에서 정화수 떠 놓고 자식들의 안녕을 빌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새벽에 멀리 샘에서 길어온 물로 정화수 한 사발 떠 놓고 동백기름 곱게 발라 머리에 쪽을 지어 비녀 꽂고 정성으로 자식을 위해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던 어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경건하고도 빛나 보였다. ‘비는’ 행위는 ‘빛나게, 비추는’ 행위라고 한다.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비는 행위 속엔 마음의 어둠을 씻어내고 자식의 앞길을 환히 밝히고자 하는 지극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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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을 잊지 않고 오곡밥을 지어 나누어 먹고, 잣불을 켜며 소원을 빌고, 달집을 태우며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 마리 로랑생은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힌 여자”라고 했다. 비단 여자뿐이겠는가. 잊힌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슬픈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잊히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거나 잊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선명한 기억이라도 세월의 바람 속에선 색이 바래고 흐려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히고 지워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꽃을 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살면서 중요한 것은 ‘때’를 알아차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꽃 필 때를 놓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때를 잘 알고 잘 맞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날마다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제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 많은 사람을 무슨 수로 다 기억하겠는가. 내 나름대로 생각해낸 가장 좋은 기억법은 만나서 함께하는 동안 상대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일부러 꾸미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정성을 다해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꽃이 제가 지닌 향기만큼 허공을 채우듯이 내가 지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상대방을 대하면 그 역시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정성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달이 떴다고 전화를 걸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