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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황금비 내리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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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황금비 내리는 저녁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맑은 하늘 보기가 쉽지 않다. 하늘 가득 비구름이 몰려들고 몸에 와 감기는 습한 바람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쉬이 우울감에 빠지게 한다. 비록 코로나의 긴 터널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마스크를 벗어 던지기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기 쉬운 요즘, 산책만큼 좋은 묘약도 없다. 굳이 무엇을 계획하거나 의도할 필요도 없다. 무작정 집을 나서 동네 골목길을 따라 걷거나 가까운 소공원을 여유롭게 산책하면 된다. 눈길 가는 곳으로 마음이 간다는 말처럼 천천히 걸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꽃과 나무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우울감도 사라지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열대성 강우로 바뀌어 가는 듯한 세찬 빗줄기 한바탕 쏟아진 뒤 바람도 쐴 겸 나선 산책길에서 제일 먼저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능소화였다. '하늘을 능멸하며 피어나는 꽃'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비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린 주황색 꽃송이가 바닥에 수북하다. 비에 젖어 더욱 짙어진 초록 위에 곱게 수를 놓던 꽃들이 떨어져 내린 골목은 환하면서도 왠지 조금은 쓸쓸하다. 서둘러 골목을 벗어나 공원을 향해 걷다가 눈이 부시도록 환한 꽃송이를 가득 달고 선 나무가 나를 반긴다. 가지 가득 노란 꽃송이를 가득 달고 서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나무는 다름 아닌 모감주나무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노란 꽃들이 황금빛 비가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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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감주나무는 요즘은 공원에서도, 가로화단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나무다. 무환자나뭇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교목으로 한여름에 꽃이 절정을 이룬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도 굴하지 않고, 수시로 퍼붓는 폭우에도 굴하지 않고 황금빛으로 꽃을 피워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환하게 만들어준다. 꽃은 멀리서 보면 노랑 일색이지만 꽃잎 아래쪽에 붉은색 점이 있다. 마주나는 잎은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꽃이 진 뒤에 달리는 열매는 꽈리처럼 주머니에 싸여 있다. 모감주나무를 염주나무라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모감주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감주나무란 이름은 닳거나 소모되어 줄어든다는 뜻의 모감(耗減)에서 비롯됐다고 하며, 영어명이 'Golden Rain Tree'인 걸 보면 노란색 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 황금비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동서양이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모감주나무가 가장 유명한 곳은 천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된 충남의 안면도에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이다. 해안선을 따라 100m쯤 이어진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중국에서 해류를 타고 온 나무 열매가 육지에 닿아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감주나무 열매는 여름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가을에 바짝 말라 세 갈래로 갈라진다. 갈라진 껍질엔 씨앗이 붙어 있고 이 껍질은 바람을 잘 받는 바람개비이자 물에 뜨는 보트가 되어 씨앗을 먼 곳으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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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기간이 길고 노란색 꽃들이 촘촘하게 달려있어 한여름 곤충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밀원식물이다. 노랗게 꽃을 피워 달고 꽃비를 뿌려대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무덥고 습기 많아 불쾌지수가 높은 장마철의 우울감을 씻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요즘은 꽃이 아름다운데다 특히 가뭄과 공해에도 매우 강해 최근 아파트 조경수로 인기지만. 모감주나무가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쓸모없음'이란 사실은 경이롭다.
땔감이 필요하던 시절, 모감주나무는 나뭇결 따라 쪼개지는 보통 나무들하고 달리 도끼질을 하면 코르크나무처럼 부서져 땔감으로 가치가 없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땔감으로 쓸모없음이 오늘날 인기 많은 조경수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황금비 뿌리는 모감주나무 아래를 지나온 저녁 산책길이 환하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