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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씨 뿌리는 도시농부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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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씨 뿌리는 도시농부의 기쁨

김석신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김석신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우리네 세상사 풍선을 많이도 닮았다. 한 쪽이 부풀면 한 쪽은 쪼그라드는 법. 도시가 부푼 만큼 농촌은 쪼그라들었고 농촌이 전담하던 음식에도 문제가 생겼다. 적은 수의 농업인이 수많은 도시인을 먹여 살리자니 농약과 비료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고 그만큼 생명과 건강은 더 위협받고 있다. 즉, ‘부메랑 효과’가 현실이 된 것이다. 우주처럼 계속 팽창하는 도시. 우주에서 보는 지구처럼 우리의 자연은 더 작아지고 멀어지는데, 과연 도시인인 내가 자연과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우리가 먹는 음식은 자연에서 오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 없이는 지속가능한 음식도 없고 인류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그래서 ‘음식 윤리’의 또 다른 핵심이 바로 ‘자연 보전’이고 이것은 ‘책임 윤리’에 해당한다. 책임 윤리는 자연을 윤리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요구한다. 마치 식중독의 의도가 없었더라도 식중독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듯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가장 못난 사람은 아마도 “내 배 째!”하며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도시농부는 적어도 도시인의 체면은 세워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그래도 부정적이고 똑똑한 누군가는 “도시농부가 쪼가리 땅에서 뭘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티끌 모아 태산’은 거짓말인가? 은행의 휴면계좌도 5년이면 1000억원이 넘는다. 여름에 빗물로 채워지는 논의 담수량(연간 167억t)은 소양댐 유효저수량(19억t)의 8.8배나 된다. 작은 논도 모이면 이처럼 훌륭한 홍수 조절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도시의 아스팔트가 흘려버리는 빗물도 도시농부의 텃밭에 스며들면 소중한 지하수가 된다. 늘 자연은 n개의 합보다 훨씬 더 큰 신비한 존재다. 산수로는 ‘1+1=2’이지만 자연의 셈법으로는 ‘1+1>2’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n개의 티끌을 태산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도시농부도 쪼가리 땅일망정 엄연히 자연에 책임을 지고 ‘보이지 않는 손’을 보태는 사람이다.

난 게으른 도시농부다. 내 농법은 ‘무농약’의 원칙은 물론 유기질 비료마저 거의 주지 않는 자연재배에 가깝다. 그래서 내 배추는 아주 천천히 자라고, 크기도 작지만, 조직은 아주 치밀하다. 이 배추로 김치를 담그면 1년 이상 지나도 전혀 무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법적으로는 ‘무허가’ 유기농이다.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팔지도 않고 유기농 표시도 하지 않으니 친환경농업육성법 제17조의5(부정행위의 금지 등)에 저촉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무허가라니? 세금 꼬박꼬박 내는 시민의 입장에서 좀 서운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나는 기쁘고 자랑스럽다. 누가 뭐래도 내 농산물은 지극히 유기적이고 자연적이니까.

세상은 시스템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무언가 만들어가는 곳이다. 친환경농업육성법과 같은 시스템이 혈관이라면 도시농부와 같은 사람은 바로 림프관이다. 인체의 구석구석까지 혈관이 갈 수 없으니 림프관이 필요한 것이다. 도시농부는 농촌에 대한 도시의 반성이며, 앞으로 계속 도시에서 살 사람들을 격려하는 긍정의 소리다. 우주의 시원에서부터 존재해온 ‘창조’의 손으로 도시가 파괴한 자연을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비록 법으로는 무허가 유기농이라 하더라도 도시농부는 우주와도 교감할 수 있는 상생의 윤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우주의 탄생 때부터 인류는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였을 뿐인데 그동안 너무 교만해졌다. 그래서 도시농부는 올해도 겸손한 마음으로 씨를 뿌리고, 흙을 일구면서, 위대한 자연의 돌봄을 기다린다. 이것이 씨 뿌리는 도시농부, 무허가 유기농의 기쁨이다.
김석신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