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한국은 거의 비포장 도로여서 소달구지와 인력거가 교통수단이었다. 강을 건너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다. 이 시절에 기차가 연기와 불을 내뿜고 내처 달렸으니 사람들은 ‘화륜거’라 불렀다.
1899년 9월 18일 기준으로 경인선을 통행하던 증기기관차는 모두 4대였다. 객차는 6칸이 매달렸다. 이 중 1칸은 황실 전용이었다. 이 열차는 하루에 단 1회 운행했다. 화차는 모두 28칸이었다. 제물포와 노량진까지 도달하는 데는 1시간 40분이 소요됐다. 시속 19.8㎞에 불과했다.
경인선을 통과하는 개통역은 7개였다. 노량진, 오류동, 소사, 부평, 우각동, 축현(현 동인천), 인천을 말한다. 하루 승객은 약 20명이었다. 여객운임은 등급별로 달랐다. 상등석은 화장실이 딸린 2인석으로 1원20전이었다. 중등석은 화장실이 없는 나무 의자였다. 이용요금은 80전이었다. 하등석은 40전이었는데 의자가 없이 서서 가야 했다.
이렇게 비싼 기차운임이어서 1등칸은 누가 탈까 궁금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은 1,2등 칸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막상 개통 후 조사해 보니 2등 이상은 한국인과 청국인(중국)이 이용하고 정작 일본인들은 3등칸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급행열차도 운행했다. 1903년 7월 1일부터 운행된 급행열차는 우각동, 부평, 오류동, 노량진역, 용산역 등 5개역은 정차하지 않았다. 최초의 경인선 구간을 운행했던 열차는 모갈-탱크(Mogul-tank)형 증기기관차 4량과 객차 6량, 화차 28량 등이다. 역무원과 종사자들은 118명이었다.
어차()도 운행됐다. 1900년 7월 1일 경인선 전 구간이 개통된 후 곧바로 임금님 전용 철도차량이 준비되었다. 이 어차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애 앨리스 루즈벨트가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 황제 전용열차를 인천으로 보내 영접했다.
어차를 직접 이용한 임금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였던 순종이다. 순종은 1909년 1월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그해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는 남대문역에서 신의주까지 특별열차를 이용하여 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통령 전용 객차는 1927년에 제작된 전망 1등 침대차를 1955년에 개조하여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정희 대통령까지 사용했다. 1966년 미국 제36대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대통령 전용차를 이용했다. 당시 경인선 통학생들은 경인선 기차 통행이 금지되어 존슨 대통령의 열차가 지나간 이후에 기관차 화통(신호나팔통) 옆에 간신히 매달려 귀가해야 했다.
한국의 철도 역사는 1894년 6월 28일 의정부 공무아문(工務衙門)에 철도국이 처음 설치된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첫 철도가 개통된 것은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간 33.8㎞ 구간이다.
철도는 한국인들의 애환을 함께한 교통수단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도구로 이용되어 왔고, 해방 후에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철도가 국가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어 도시교통시대를 열었고, 2004년 4월 1일에는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됨으로서 명실상부한 21세기 교통의 총아로 거듭나게 태어났다.
6월 28일은 철도의 날이다. 원래는 9월 18일을 기념했으나 일제 잔재라는 비판에 따라 2018년에 철도국이 설립된 1894년 6월 28일로 개정됐다. 그동안 국가의 동맥 역할을 하면서 가장 빠르고 넉넉한 공급망 역할을 잘 수행했다. 지금 세계를 선도할 만큼 성장한 철도산업은 철도인들의 남다른 의지로 만들어진 결과이다.
더하여 철도 레일조차 미국 일리노이스틸의 제품을 써야 했던 빈곤한 철강 산업도 오늘날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국가로 성장시킨 일들이 돋보인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