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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국립은행, 크레디트스위스서 1조5600억원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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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국립은행, 크레디트스위스서 1조5600억원 손실

"불투명한 펀드 운영 위험성 경고"

2021년 1월 사우디에서 열린 국제 투자 컨퍼런스 무대에서 토론하는 토마스 고트스타인 크레디트스위스 CEO(왼쪽)와 야세르 루몐 PIF 총재.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2021년 1월 사우디에서 열린 국제 투자 컨퍼런스 무대에서 토론하는 토마스 고트스타인 크레디트스위스 CEO(왼쪽)와 야세르 루몐 PIF 총재. 사진=로이터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스위스 금융 대기업 크레디트스위스그룹의 신용불안과 위기의 발화점 중 하나는 최대 주주인 사우디국립은행(SNB) 수뇌부의 추가 출자 불가 발언이었다. 구제금융의 성패도 중동 산유국 주주의 대응에 달렸다. 이번 위기는 중동 오일 머니의 커진 존재감과 불투명한 펀드 운영의 위험성을 각인시켰다.

"불가능하다". 경영난에 빠진 크레디트스위스에 대한 추가 출자 여부를 묻는 질문에 지난 15일 사우디국립은행 암마르 알 쿠다이 행장의 발언이 크레디트스위스 주가의 하락을 가속화했다.
중동 투자자들의 유럽 금융시장에서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드러난 사건이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주주를 살펴보면 최대 주주인 사우디국립은행이 9.9%, 카타르 투자청이 6.9%, 사우디의 올라얀 그룹이 4.9%로 그 뒤를 잇는다. 중동 기업 3곳이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스위스 UBS의 크레디트스위스 구제금융으로 SNB는 투자금액의 80%에 해당하는 12억 달러(약 1조56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카타르는 주식 손실에 더해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AT1 채권'의 가치가 제로(0)가 됐다. 카타르는 한때 AT1 채권을 45억 달러(약 5조8500억 원)어치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랍 산유국이 펀드를 통한 투자는 탈석유 구조개혁의 핵심이다. 금융 부문은 정보기술,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손꼽히는 투자 분야였다. 국제시장 진출과 국내 산업 육성의 발판으로 스위스 은행에 대한 투자를 중시하고 있어 일단 이번 구제금융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전통적으로 중동 산유국의 자금 운용을 담당해 온 것은 미국 투자은행이다. 금융 비즈니스를 직접 맡아 산업으로 키우고 싶은 산유국들은 접근성이 좋은 유럽 은행에 대한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카타르 투자청은 과거에도 추가 출자와 AT1 투자로 크레디트스위스 경영을 지원한 바 있다. 카타르는 영국 바클레이즈에도 투자하고 있다.

보수적이었던 투자 전략의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투자펀드(PIF)다. PIF는 SNB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문제는 투자 과정이 불투명하고 외부의 감시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관계자들은 실세인 무함마드 왕세자가 세세한 종목 선정까지 관여하고, 시장 평균을 웃도는 '초과 수익률'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PIF는 코로나19 감염 초기에 공원 이용객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 미국 월트디즈니, 이용객이 급감한 크루즈선 운영사 카니발 등에 투자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저평가 구간에 있는 디스트레스드(distressed) 자산 발굴이라는 투자 방식으로 안정적 운용이 많은 정부계 펀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크레디트스위스 투자도 무함마드 왕세자가 SNB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미국 씨티그룹 출신의 마이클 클라인이다. 그는 크레디트스위스 이사로 경영정상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AT1(금융기관의 건전성에 문제가 발생할 때 투자자 동의 없이 상각하거나 보통주로 전환하는 신종자본증권) 채권 투자자들이다. 이례적인 구제금융으로 그 가치가 폭락한 반면, 주주의 이익은 어느 정도 지켜졌다. 금융이론의 상식에 반해 채권이 아닌 주식 투자자가 우선적으로 보호받은 것에 분노한 일부 AT1 보유자들은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다"며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사우디는 유럽 유명 축구클럽 인수와 고액 상금 골프대회 투자로 논란을 일으켰다. 보수적인 유럽 금융계에서도 오일 머니를 앞세운 사우디의 존재감이 커지자 반발과 경계가 확산되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국영 석유회사 사우디 아람코의 주식 매각 수익 등으로 PIF를 세계 최대 규모의 펀드로 키우려 하고 있다. 현재 약 6000억 달러(약 780조 원)의 운용자산을 8000억 달러(약 1040조 원)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다.

밀실에서 결정되는 운용 방침과 실체는 블랙박스로 남아있다. 거대해지는 펀드의 위험한 운용은 세계 금융시장의 다음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