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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질서' 종언 고하는 美 칩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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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질서' 종언 고하는 美 칩스법

한 여성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문을 닫은 모스크바 루이비통 매장을 지나가고 있다. 많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서 사업을 중단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한 여성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문을 닫은 모스크바 루이비통 매장을 지나가고 있다. 많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서 사업을 중단했다. 사진=로이터
최근 지난 50년간 미국의 ‘정치 질서(political order)’로서 냉전 종식에 기여하고 투자와 교역의 자유화를 통한 세계화를 이끈 ‘신자유주의 질서(neoliberal order)’가 종언을 고했다. 그 뒤를 이어 중국의 기술 패권 저지를 위한 보조금 제공과 동맹들 간 경제 연합 결성으로 대표되는 ‘재세계화 뉴딜 질서(re-globalization new deal order)’가 부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의 종언을 알린 것은 미국이 지난 2월 말 발표한 반도체법의 시행 방안이었다. 2008~2009년 대침체(Great Recession)와 부의 양극화로 쇠퇴해온 신자유주의 질서가, 바이든 미 행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시장에만 맡겨두었다가는 중국의 반도체 패권 저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만든 반도체법의 시행에 착수함으로써 최종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다.

지난 2월 28일 발표된 반도체법 시행 방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반도체 제조 중심국 지위의 회복을 위해 미국으로 반도체 공장을 이전하거나 새로 짓는 기업들에 390억 달러(약 50조원)의 보조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조금을 받은 기업들의 대중(對中) 투자는 금지되고 이들이 만든 반도체는 미국의 군사안보 부문에 우선 공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체법의 이 같은 시행 방안들이 신자유주의 질서의 부음을 알리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방안이 바이든 미 행정부의 정책을 넘어서 구속력을 갖는 법에 기초해 신자유주의 질서의 핵심 가치로서 미국이 탈냉전 시대에 전력을 다해 추구했던 세계화를 떠받쳐온 투자와 교역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투자·교역 자유 제한 통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저지


지난 100년간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쳐온 미국 주류 이념과 가치의 합으로서의 정치 질서는 두 개였다. 하나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존속했던 ‘뉴딜 질서(new deal order)’였다.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등장해 1980년대 미국의 경제 호황을 이끈 뒤 냉전 종식 후 1990년대 들어 세계화로 꽃피웠다가 이번에 종언을 고한 신자유주의 질서였다.

뉴딜 질서는 자본주의를 시장의 자율에만 맡겨 놓으면 경제적 재난이 초래된다는 확신에 따라 수립된 정치 질서였다. 2차 대전 이후 출범한 미 행정부들은 이 같은 확신으로 적극적인 재정 및 금융 정책으로 경제를 주도했고 그 결과 미국과 서유럽 등 자유주의 진영이 뉴딜 질서에 따라 2차 대전으로 어려워졌던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한 정치 질서가 내부의 모순으로 발생한 지배적인 위기를 수습하는 데 실패하면 새로운 정치 질서가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뉴딜 질서가 1970년대 초 신자유주의 질서에 바통을 넘겨야만 했던 계기는 1973년 중동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 공급 제한으로 깊은 경기 침체와 높은 물가 인상이 동시에 일어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질서가 1980년대에 미국의 정치 질서로서 확고히 자리 잡은 데는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만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믿음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81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재정지출 축소와 대규모 감세를 단행한 데 이어 가격과 경쟁에 대한 정부의 통제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 덕분에 미국 경제는 1980년대 중후반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벗어나면서 엄청난 호황을 구가했다. 레이건은 이에 따른 자신감으로 소련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이 고르바초프 체제로 전환해 개혁과 개방에 나섰다가 해체되면서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종식됐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질서가 냉전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와 롱비치의 항구에 선박들이 모여들고 있다. 세계화로 이 같은 풍경은 자주 볼 수 있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 질서가 재편되면서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와 롱비치의 항구에 선박들이 모여들고 있다. 세계화로 이 같은 풍경은 자주 볼 수 있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 질서가 재편되면서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사진=로이터

신자유주의 질서가 국가 간 투자와 교역의 자유화로 상징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까지 발전한 것은 1993년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가 월가의 초국적 자본을 앞세워 완전한 변동환율제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금융과 외환 시장의 자유화 압박에 나선 결과였다. 그 결과 1997년 말 한국은 IMF 구제금융 사태를 겪어야 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첫 번째 10년까지 미국에 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조업 중심으로 중국의 수혜가 미국보다 더 컸다. 중국이 값싼 노동력과 세제 혜택 등으로 미국과 일본·한국 등에서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공장들을 유치함으로써 기술 격차를 급속하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이 기술 격차를 줄일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펀딩을 무기로 첨단 기술을 통째로 이전받아온 데서 찾을 수 있다. 미국 기업들이 첨단 기술을 개발했으나 자금이 부족해 제품화에 어려움을 겪자 이들 기술을 중국에 넘기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따라 미국 기업들이 중국으로 공장과 첨단 기술을 이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결과 중국은 2010년대 중반 주요 첨단 기술 분야를 자국 중심으로 재구축(remaking)함으로써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목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시진핑이 2016년 첨단 기술의 연구·개발 요새들에 대한 총공격을 촉구하고 2025년까지 첨단 기술 외국 의존도를 30% 이하로 낮춘다는 ‘Made in China 2025’라는 계획에 착수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시진핑이 꿈꿔온 ‘중국몽(中國夢)’의 요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기업들이 누려온 중국으로의 공장과 기술 이전의 자유가 첨단 기술 패권을 확보해 디지털 감시와 통제 체제의 기술 전제주의(tech-autocracy)로 세계 지배를 꿈꾸는 위험한 중국을 탄생시킨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중국의 첨단기술 접근 막고 동맹국 간 경제연합 강화


실제로 첨단 기술 부문에서 중국의 추격은 위협적이다. 중국의 화웨이는 2019년 미국 부품 하나 안 쓴 5G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메모리와 메모리 칩에서는 아직 격차를 크게 좁히지 못하고 있으나 안심하지 못한다. 인공지능(AI)의 경우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가 “AI 슈퍼파워는 중국일 수 있다”고 말할 만큼 중국의 기술이 비약적이란 평가가 많다.

미국은 2020년부터 중국을 상대로 반(反)신자유주의적 규제를 취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미 상무부가 화웨이가 외국에서 미국 기술로 반도체를 제조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 추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금융 지원도 동원했다.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화웨이 제품을 못 쓰도록 금융 인센티브들을 제공했다.

그 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반(反)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규제는 동맹국들의 기업들에도 확대 적용됐다. 첨단 기술을 보유한 미국 기업들은 물론 동맹국들의 기업들까지도 중국으로 기술을 이전하거나 중국에서 첨단 제품을 만드는 것을 불허했던 것이다. SK하이닉스도 고가의 극자외선(EUV) 광학 장비를 중국 공장에 도입하려다 미국의 불허로 불발로 끝났다.

미국이 2022년에 반도체법을 만든 것은 2019년부터 3년간 정책과 규제, 지원 등으로 해온 대중 견제에 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책과 규제만으로는 미국과 동맹국 기업들에 기술 이전, 공장 신설, 첨단 기술을 적용한 제품 생산을 금하는 것이 쉽지 않고, 미국이 반도체 제조 중심국 지위 회복을 위해선 법으로 제한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도체법은 두 개의 큰 의미가 있다. 하나는 미국에 투자하는 국내외 반도체 기업들에 보조금을 준다는 점에서 ‘첨단 기술 뉴딜’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동맹국들과 ‘비공식 경제 나토’ 같은 연합체와 각 기술별 소자 연합(mini-lateral coalitions)을 만들어 첨단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막는 ‘재세계화(re-globalization)’가 공식 개막됐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반도체법의 시행 방안 발표를 계기로 부상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는 ‘재세계화 뉴딜 질서’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첨단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뉴딜식 지원을 AI와 양자 컴퓨팅 등으로 확대하면서 이들 첨단 기술 전 부문에 걸쳐 동맹국들과의 경제 연합을 강화하는 재세계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美의 '재세계화 뉴딜 질서'에 한국 적극 참여해야


미국이 뉴딜 질서로 2차 대전 이후 미·소 1차 냉전의 초기 30년 동안 소련과 경쟁해야 했던 이유는 미·중 2차 냉전의 초기인 현재 신자유주의 질서가 종언을 고하고 첨단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한 반중 재세계화 뉴딜 질서가 부상한 것과 같다. 1차 냉전 때도 소련이 첨단 기술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은 이번에 발표된 반도체법의 시행 방안과 관련해 미국이 2차 냉전 체제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재세계화에 적극 참여한다는 관점에서 전략적인 대응이 요청된다.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에 이익 공유와 대중 투자 금지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고 노예 계약이라는 식의 평가는 재세계화 뉴딜 질서의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패착을 낳을 수 있다.

세계 경제 질서의 이 같은 재세계화 뉴딜 질서로의 거대한 전환은 전 세계가 첨단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신냉전 체제로 급속히 돌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윤석열 정부가 오는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력해야 할 최대 현안은 미국 주도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대중 비공식 경제 나토와 첨단 기술별 연합 참여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교관 CNBC KOREA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