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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영화(38)] 영화 '콜 오브 더와일드'…인간은 희망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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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영화(38)] 영화 '콜 오브 더와일드'…인간은 희망으로 살아간다

영화 '콜 오브 더와일드'.이미지 확대보기
영화 '콜 오브 더와일드'.
다큐멘터리에 자주 나오지만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임사체험을 하신 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사례들이 있다고 한다. 우선 유체이탈 현상이다. 영혼이 자기 신체를 빠져나와 누워있는 자신을 보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는 아주 밝은 빛이 나오는 터널을 통과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일생이 어린시절부터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터널을 통과하면 이미 돌아가신 사랑하는 가족이나 신을 만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세상에서 만난 가족이나 신은 터널을 통해 계속 이 세상을 지켜보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개를 의인화시켜서 인간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감동을 주는 영화가 있다. '콜 오브 더와일드'라는 영화에서는 벅이라는 개를 의인화시켜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시점에서 개의 모험을 다루고 있어서 인간이 개를 지켜보게 되는 독특한 시점의 영화이다. 마치 우월한 존재인 신이 인간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부연하자면 이 영화에서 개를 지켜보는 관객의 시점으로 인하여 신이나 다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의 시점에서 인간을 지켜보고 그 인간이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가고 신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하려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어렴풋이라도 신이 원하는 세상마저도 알게 되는 듯한 묘한 비유가 있다. 더군다나 의인화시킨 주인공 벅이라는 개는 인간이 선으로 추구하는 사랑과 의리를 가지고 다른 개들의 신임을 받고 그들을 이끌어간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생활하면서 인간에게까지 사랑과 의리를 지키고 착한 인간을 구해주고 도와주며 악인을 응징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영화 내용을 보면 신과 인간세계를 이어가는 방식에 대한 메타포로 이해하고 감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불쌍한 강아지 벅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1890년 골드러시 시대,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금광이 발견됐다는 알래스카로 몰려든다.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길러진 벅은 개장수에게 납치되어 알래스카로 팔려가게 된다.

거기서 안락했던 과거와는 다른 험악한 환경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우편배달 썰매팀으로 팔려가 팀의 신참이 된 벅은 거친 환경과 약육강식의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벅은 약한 개들을 도와주면서 그들의 지지로 우편물을 운반하는 개무리의 리더가 된다. 그 과정에서는 벅이라는 개가 타고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본능을 보여주고 그것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임을 알게 해준다.

벅은 위기 때마다 타고난 용기와 정의감, 그리고 사랑과 배려와 지혜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벅이 만난 마지막 주인은 벅과 새로운 교감을 시도하고 가르친다.

그는 금광을 찾으러 가면서 벅을 데려가는데,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지도밖에 있는 곳을 목표지로 설정하고 그것을 지도 밖의 바닥에다가 그려서 벅한테 보여주고 그곳으로 같이 향한다.

영화배우 해리슨 포드가 아픔을 가진 벅의 마지막 주인역을 연기한다. 그 역시 아픈 현실 밖으로의 구원을 원하여 위험한 여정을 선택했고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벅을 인도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을 벗어난 다른 세계로의 모험을 꿈꾸고 있다. 벅을 미지의 세계로 데려가는 해리슨 포드와 같은 안내자가 아니더라도 자각에 의하여서라도 용기를 갖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한다.

벅 역시 주인을 따라나선 여행이지만 어려음이 닥칠 때마다 쓰러지기보다는 용기와 재치로 그리고 주인과의 교감으로 목적지에 다다르고 벅은 진정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게 된다.

용기와 희망을 가진 강인한 생명체만 가능한 모험의 길을 가면서 이 영화는 벅으로 감정이입 된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결국 인간의 시점으로 보아서는 순진무구한 벅으로 인하여 동행하는 인간도 교감을 받으며 용기를 얻고 목적지에 다다른다.

엠비씨제작자회사의 김흥도 감독은 아래 장면에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어딘지 모를 목적지이고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지역일수도 있지만 지도 밖에다 표시하고 용감하게 나아가는 장면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그가 늘 깨달아온 희망에 대한 정의와 일치한다고 했다. 그가 정의하는 희망은 다음과 같다. 영화 터널에서처럼 갑자기 터널이 무너져 내려도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오면 살아나갈 수 있고 그것이 희망이다.

희망의 빛은 실낱처럼 들어오든지, 크게 난 구멍으로 들어오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빛의 양은 중요하지도 않다. 한 줄기 빛이라도 들어오기만 한다면 방향성을 알게 되고 가시적인 희망을 가짐으로써 살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빛이 아예 없는 어둠속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확률은 두 가지다. 가든지, 포기하든지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가야 한다. 실낱같은 빛조차 없더라도 가야 한다. 조난자 스스로가 마음속으로 빛을 만들어서라도 가야 한다. 거기서 위대함이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인간은 코로 숨쉬는 것이 아니라 희망으로 숨쉰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