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이지혜 안무의 창작발레 '하얀 거울, 白鏡'…백색 제단 위에 투영된 눈물의 미학

공유
0

이지혜 안무의 창작발레 '하얀 거울, 白鏡'…백색 제단 위에 투영된 눈물의 미학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서정주의 시들이 향기를 머금은 채 다발로 나왔다. 발레 <하얀 거울, 白鏡>은 서정주의 ‘국화옆에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지혜의 발레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아스라이 추억을 불러왔다. 그립다! 그 푸르던 날의 선홍빛 사연이. 하얀 겨울 앞에 서면 금새라도 동백꽃이 초록을 몰고 올 수 있었것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강수연의 패기를 불러왔다.

이지혜는 눈물처럼 떨어지는 봄을 남기고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하얀 거울의 파편이 자리를 벗어나면서 봄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봄은 그녀가 쓰려져야 더 아름답다고 할 것인가? 숨 가쁘게 발레만 생각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성숙의 여름으로 가는 열차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맡기고 있었다. 오늘도 발레리나는 여름의 오로라와 동승하고 있다.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이지혜 ON 발레앙상블’ 주최·주관, 발레블랑, 광진문화재단, 전문무용수지원센터 후원으로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白鏡>이 공연되었다. 겸손한 출사작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2021), <허상예찬>(2021), <좁은 길 끝에>(2021), <그 너머엔>(2019), <Beyond the Edge>(2017), Her Story(2016), Wandering(2016)등의 안무작을 발표해왔던 이지혜의 이번 공연은 ‘거울’을 통한 불확실한 자아 탐구의 신비감을 분출했다.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한국적 서정에 희망의 현대감을 두루 입힌 <하얀 거울, 白鏡>은 현실에 대한 거친 고백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수반한다. 거울의 상(像)에 관한 상상은 대체로 불안한 심리를 많이 의미하지만, 마지막 신(scene)에서의 얼음처럼 깨지는 거울은 파경의 아픔보다는 닫힌 상황을 타개하는 희망의 움직임으로 읽히고자 하는 기다림의 의식으로 보인다.

<하얀 거울, 白鏡>은 외관상 ‘거울’ 이미지에 집중되어 있다. ‘하얀 거울’은 ‘백색 발레’에 바치는 헌사이다. 순백의 이미지에 합당한 한국식 표현은 ‘하얀 거울’이 되어야 했다. 차갑게 식어버린 ‘사이’에 대한 따스한 감정을 찾아내는 일은 ‘경(敬)과 존중’의 예(禮)이다. 이지혜는 고급스런 물감인 백색으로 낭만적 서사를 써내려가며 소중한 거탑(巨塔)을 쌓았다.

<하얀 거울, 白鏡>은 프롤로그 ‘빈 거울’을 포함한 1장: ‘거울에 비친 꽃’, 2장: ‘작은 거울 속에’, 3장: ‘거울 속 거울 찾기’, 4장: ‘거울 파편 속에서’에 이르는 4장(場)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장은 ‘거울’과 관련된 소제(小題)를 단다. 거울은 비어있거나, 자신의 얼굴을 비추거나 물체를 담거나, 허상의 과거를 기억하거나, 단절과 축복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감정을 이어가는 음악, 안네 뮐러(Anne Mueller)가 울부짓듯 ‘Solo? Repeat!’(혼자라고? 되뇌어봐!)라고 하는 듯하다. 이어 니코라스 브리텔(Nicholas Brittel)이 ‘The middle of the World’(이 세상의 한가운데)의 가르침을 줄 것 같다. 삶의 위안이 되는 솔깃한 교훈은 막스 리히터(Max Richeter)의 ‘All Human Beings’(인간들이란)에서 느낄 수 있다.

프롤로그 ‘빈 거울’: 거울을 바라본다. 내 모습을 보고 싶어 들여다보지만, 거울 속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뒷모습의 여인(김다애)은 추억을 반추하듯 솔로로 세상을 느낀다. 영상으로 거울이 다가선다. 군무들은 어떤 위치나 각도에서도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연결된 캐논 움직임 속에서 비어있는 거울 속 공허함을 표현해낸다.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여인은 랜턴을 들고 빈 공간을 바라보다가 또 다른 거울 앞의 자신(이은미)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자신을 비추고자 함이다. 온전히 마음을 비우고 지혜롭게 정진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이다. 일상에서 바라보는 젊은 날, 보랏빛 청춘이다. 나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움직임은 S-Wave(Success Wave, 성공의 물결)를 지향하고 있었다. 바람이 인다.

1장: ‘거울에 비친 꽃’ ; 거울에 비친 화려한 꽃들은 허상이다. 여인은 다시 어두운 푸른 빛이 도는 빈 거울을 마주한 채 남겨진다. 막스 리히터(Max Richeter)의 ‘사랑과 상상’(Love and Imagination)이 7개의 하얀 큐브와 핑크색 의상의 유동(流動)에 뿌려진다. 큐브 위에 앉은 여인들은 동틀 무렵을 기대하는 설레임이나 분수 같은 꿈을 안고 키우던 시절을 연기해낸다.

Mous의 ‘Gaze’(응시)가 신비감을 창출하고, 조명은 꿈이 존재했음을 증거한다. 만화경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배경영상이 청춘의 봄을 가득 부풀리고 있다. 막스 리히터의 ‘봄’은 청춘을 보살피는 수업시대의 스승을 불러낸다. 봄밤이 익어가는 소리가 어느 날 그리움으로 달려들 듯한 착각이 인다. 높은 곳에서 춤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 그리움의 인자(因子)는 살아있다.

2장; ‘작은 거울 속에’ ; 허상이 무너지듯 내리고, 작은 거울 속에서 위축되고 웅크린 자신을 만난다. 안네 뮐러의 ‘Drifting Circles’(떠도는 원들)이 감지한 열정, 환상에서 깨어나 혼자 남겨진 여인(김다애)의 심리는 커다란 큐브들이 쏟아져 내리는 영상과 큐브에 갇혀있는 움직임으로 시각화된다. 그 안에서 춤추고, 그랑 블루의 영상과 비슷하게 사유한다.

한때 청춘을 뒤흔들던 뜨거운 여름날의 아름다운 꿈들을 꺼내 본다. 초라한 모습의 여인(이은미)과의 거울을 마주 보는 듯한 듀엣(이은미 류형수)은 무기력한 모습의 움직임과 변형되어 가는 큐브의 영상이 대변한다. 아카이드 파이어와 오웬 파렡(Arcade Fire & Owen Pallett)이 상상한 ‘꿈같은 시절’(Photograph)이 강조될수록 장맛비 같은 슬픔은 굵게 길게 자리한다.

3장: ‘거울 속 거울 찾기’ ; 거울 속 연속되는 이미지들처럼 무의미한 빈 거울들이 연결된 공간에서,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을 비춰줄 거울을 찾아 헤맨다. 멍때리기는 영글어가는 자신에 대한 격려이다. <Hanging D>의 남녀 4인무는 정도를 찾아가고, 무대를 가로지르며 뛰어다니는 군무, 그 분주한 군중 사이에서 헤매던 여인(김다애)은 출구를 모색한다.

사내(이승현)와 듀엣이 조엡 비빙(Joep Beving)이 리드하는 Cello Octet Amsterdam의 <Hanging D>의 음감을 만날 때까지 방황은 지속된다. 청춘은 통과의례를 마친다. 슬프고 아름다운 추억을 카르로스 시파(Carlos Cipa)의 <And She Was>와 에지오 보소와 피라모니카 교향악단(Ezio Bosso & Orchestra Filarmonica)의 교향곡 2번 <나무들 속삭임 아래에서>(Under The Trees' Voices)가 담당한다.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백경'. 사진=옥상훈


4장: ‘거울 파편 속에서’ ; 거울은 과거를 뒤돌아보고 현재의 교훈을 찾는 도구이다. 무수히 이어지는 빈 거울을 뚫고 깨져버린 파편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나 나를 밝게 비춰주는 하얀 거울을 만난다. 혼자 남겨진 여인(김다애)과 거울이 깨져나가듯 캐논으로 이어지는 군무의 움직임이 있다. 파경(破鏡)은 이별과 동시에 잘게 쪼개져 행운을 가져오는 도구로도 인식된다.

<하얀 거울, 白鏡>에서 거울이 깨지는 것에 비유한 삶. 고조되는 음악에 자켓을 벗어 던지고 쓰러지는 군무. 홀로 서서 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김다애)은 심중의 극기를 다짐한다. 화평의 제자리를 찾는 여인의 모습을 보인다. 인생에는 기쁜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날에 준비해야 한다는 다짐이다. 여인(김다애)은 이지혜의 분신이며, 그 심경을 대리한다.

이지혜 안무의 <하얀 거울, 白鏡>은 이화여대 출신 발레리나들의 의기투합이 일구어낸 성과물이다. 모든 것이 어려운 시절에 자신을 성찰하며 바른 정신 자세를 견지하는 예술가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지혜는 기억에서 끄집어낸 이미지들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자신의 갈증을 계(戒)로 삼는다. <하얀 거울, 白鏡>은 의미있는 일 편의 창작 발레로서 세월이 흐를수록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향방을 가늠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할 것이다.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에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