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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워치] 만추에 덕수궁 중화전 앞에 서서, '中'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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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워치] 만추에 덕수궁 중화전 앞에 서서, '中'을 생각해본다

이영한 지속가능과학회 회장
이영한 지속가능과학회 회장


서울 단풍의 초절정은 11월 초다. 매년 11월 첫 번째 토요일에는 학생들이나 지인들을 인솔하고 창덕궁이나 사대문 안 답사를 했다. 올해는 덕수궁에서 시작했다. 덕수궁에서 제일 큰 한식 건물은 중화전이다. 이 건물의 이름을 왜 ‘중화전’으로 지었을까? 그리고 덕수궁은? 대한제국시대 당시에는 고종 황제가 사는 궁궐의 이름은 경운궁이었는데, 고종이 퇴위된 1907년에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덕수궁(德壽宮)’은 ‘덕을 베풀고 만수무강하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다. 임금의 궁인 경운궁으로부터 일종의 상왕의 궁으로 그 격을 내린 것이다. 원래로 돌아가서 ‘경운궁’을 되살리는 것도 검토해봄 직하다. 비록 나약했을지라도 국운의 회복을 위해 부단히 움직였던 대한제국의 정궁 이름으로.

조선 시대 한성에는 5대 궁궐이 있었다. 처음 건립 시간을 순서대로 말한다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다. 이들 궁궐의 정전(正殿)은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희궁 숭정전, 경운궁 중화전이다. 경운궁을 제외한 나머지 궁궐은 모두 ‘정전(政殿)’의 명칭을 사용하고 그 앞에 ‘근(勤)’, ‘인(仁)’, ‘명(明)’, ‘숭(崇)’을 붙였다. 근면한 정치, 인의 정치, 밝은 정치, 높은 정치를 하는 임금의 집이란 뜻이다. 중화전이 건립되는 1902년이 되면, 고종은 만 50세, 재위 40년이 된다. 정치가, 통치자로서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종은 새로 지은 정전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심사숙고하였을 것이다. 기존 이름들과 같이 ‘○정전(政殿)’으로 할 것이냐? 고종은 파격적으로 새로운 이름인 바로 ‘중화전(中和殿)’으로 지었다. ‘중화전’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중화(中和)'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며 조화로운 상태'를 뜻하며, 《중용(中庸)》에서 유래한 말이다. 구한말 조선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을미사변이라는 치욕적인 참화를 겪으면서 조선의 외교 노선은 분명해졌다. 서구 제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밀어내고자 했다. 이 상황은 도시 공간에 명확히 나타난다. 황급히 아관파천이 있었다. 러시아는 친일적이지 않았고, 러시아공사관도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여 방어에 유리했다. 1년 후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인 경운궁으로 환어(還御)했다. 1897년 당시 경운궁 주변에는 영국공사관, 미국공사관, 프랑스공사관, 러시아공사관, 이탈리아공사관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운궁 북측에는 영국공사관이, 서측에는 미국공사관이, 남측에는 독일공사관이 접하고 있었다. 이들 공사관 사이의 공간에 자리 잡았다. 고종은 이들 국가 중에서 한 국가에 치우치지 않고 바르며 서로 조화로운 상태이기를 바랐다. ‘중화전(中和殿)’에는 이러한 대한제국의 이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낙엽이 뒹구는 만추에, 경운궁 중화전 앞에 서서,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중(中)’이란 무엇일까? 대구 달성군을 지나가는 낙동강 남쪽 강변에 동방 오현 중 한 분인 김굉필을 모시는 도동서원이 있다. 이 서원의 강당 건물이 중정당(中正堂)이다. 가운데에 서면 ‘치우치지 않는다’, 치우치지 않으면 ‘바르다’, 그래서 중(中)은 바르다(正)이다. 또한, ‘중’은 양단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중’은 존재한다. 음과 양이 있기에 ‘중’이 있는 것이다. 각 개체는 ‘중’의 도움을 받아서 서로 다름의 가치를 현시한다. 각 개체의 공존 상생과 조화는 ‘중’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중’은 ‘화(和)’이며, ‘생(生)’이다.

우리 속세에서 ‘중(용)’의 가치관이 사라진 지 오래다. 안타깝다. “우리 백이 옳다”, “너희는 악이야!” 싸우고 있다. 극단적 흑백논리와 전투적 팬덤 정치로 인해 회색 영역은 그 존재 자리 자체를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동양화의 미덕이 회색과 여백에 있듯이, 회색은 그림자와 같이 오히려 흑백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더욱 부각시켜 줄 수 있다. 회색 지대에 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영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지속가능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