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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이병률 ‘저녁 풍경 너머 풍경’과 귀스타브 카유보트 ‘작업복을 입은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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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이병률 ‘저녁 풍경 너머 풍경’과 귀스타브 카유보트 ‘작업복을 입은 사내’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점점 더 만나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내가 ‘외면’한 까닭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나를 ‘외면’한 때문인지 좀처럼 분별이 되지 않아서 끝내는 알 수는 없지만 가장 서러운 사내의 시간이란 생각하건대 집에 왔을 때다. 그 누구도 내가 말한 “다녀왔습니다”에 화답해주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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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풍경 너머 풍경 / 이병률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 황혼에 눈길을 주다보면 저

멀리 풍경이 강가에 다리 놓는 모습 보입니다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서

로 각자의 기둥을 놓고 손을 내뻗는 모습에 무작정 속이

아리다가도 그 속도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해 보이기도

하여 창자가 다 휘둘립니다

며칠에 한번쯤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神)은 자

꾸 자리를 만들고 허문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당신들도 지워졌으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

은 당신들의 장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

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

게 저녁은 옵니다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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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카유보트 ‘작업복을 입은 사내(Man in a Smock)’,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화가와 시인. 화가에게 손은 붓이다. 그 손으로 완성한 작품에 우리는 참 아름답구나, 감탄한다. 그런 시간을 담은 ‘저녁 풍경’을 보여준다. 시인에게 눈은 붓이다. 그 눈으로 ‘너머 풍경’을 빚은 작품이 시다. 시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상상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피로한 희망을 늘 붙들고 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디를 방랑해도 우리의 피로한 희망은 평온을 찾아 집으로 되돌아온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올리버 골드스미스가 한 말이다. 말하자면 집의 소중함 가치를 무릇 강조한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앞의 시는 이병률(李秉律, 1967~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년)에 보인다. 나는 “다녀왔습니다”로 끝나는 시가 퍽 인상적이었다. ‘집’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밖에 있다. 그 이유가 일로써, 아니면 산책이나 여행, 긴 방랑이 되었든 간에 어쨌거나 마침내 집에 도착해서 대문에 들어서면, 나는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꺼내든다. 우리가 무심결에 저 사람에게 던진다. 저 사람(夫人)은 내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아내 심지어는 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는 걸까. 그 말을 꼭 해야 되는가. 해야 한다. 말을 함으로써 금세 화답(“다녀왔냐”, “다녀오셨어요”)이 들려오고 나는 안녕하는 평온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고전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적중함이 있다(夫人不言, 言必有中)”가 그것이다. 여기서 부인(夫人)은 옛날부터 ‘상대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경어(敬語)로 상대방을 가리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알맞다. 그렇지만 집으로 들어오는 남자에게 있어서 ‘저 사람’이란 ‘집 안에 여인들’로 제한된다. 한자 ‘안(安)’ 자의 의미가 그런 거처럼. 한자 ‘安’ 자에 대하여 <문자강화 1>라는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安은 가문의 사당에 참예하는 젊은 며느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집으로 시집 가면 그 집안의 조상 신령에게 인사하여 허락을 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집안에서 여자가 안락하게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시라카와 시즈카 <문자강화 1>, 100쪽 참조)

그렇다. 집 안에 여인이 있을 때, 바깥의 사내들은 안심을 한다. 집으로 들어와서 비로소 안도함에 가닿는다. 휴식을 짧게 취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병률의 시를 일별하면서 평하길, “그의 시는 얄밉고 위험하며 약하고 슬픈 남자의 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대체로 “다녀왔습니다” 위로 펼쳐지는 3행의 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

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

게 저녁은 옵니다

그렇다면 시에서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당신이 ‘남자들’을 말한다고 본다. 즉 ‘사내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싶다. 특히 “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라는 부분을 읽다가, 나는 울컥 한 그림을 꺼내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림을 시에다 포개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다시 우리가 앞의 그림을 지금 만나러 가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뒷짐을 지고 사내가 일 갔다 돌아오는 저녁 풍경

나의 개인적 취향이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병률의 시를 읽다가 오래전에 책에서 보았던 그림 <작업복을 입은 사내>(1894년 作)가 생각이 났다. 물론 ‘등짐’이 아니라 ‘뒷짐’을 지고 천천히 느릿느릿 걷는 남자의 뒷모습이 시의 화자와 아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그림에 대해 안경숙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혼자 걷다 보면 이 그림에서처럼 다른 산책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남자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여인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한적한 산책길을 걷고 있습니다. 남자의 시선이 여인을 향하고 있는 듯한데, 혹시 그건 저만의 생각인가요? 갑자기 저는 짓궂은 상상에 빠져봅니다. 만일 저렇게 한가로운 상황에 소나기라도 내린다면?

그림 속의 남자처럼 유유자적 걷고 있는데 소나기가 내리면 그때는 무조건 뛰어야겠지요. 저렇게 점잖게 걷고 있는 두 사람도 아마 별 수 없을 겁니다. 쏟아지는 비를 쫄딱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몸을 피할 곳을 찾아 어디로든 뛰어야지요. 그렇다면 이런 전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지자 남자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여인도 깜짝 놀라 드레스 자락을 쥐고 뜁니다. 십중팔구 여인보다는 남자가 더 빨리 달릴 테고 그러다 보면 금세 여인을 따라잡게 되겠지요. 근처에 몸을 피할 장소를 남자가 알고 있다면 여인을 혼자 두고 가기 안쓰러워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 수도 있을 겁니다. 여인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지만 이내 손을 잡습니다. 사실 아까부터 뒤에서 오던 남자가 궁금하던 참이었거든요. (중략) 이렇게 마음대로 소설을 쓰다 보니 이 그림 속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서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관계를 이렇다 하게 보여주는 내용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다만 작품의 부제가 ‘에트르타의 생클레르 길을 걷는 마글루아르 영감’인 점으로 미루어 카유보트 또한 에트르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화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에트르타는 프랑스 서부 노르망디에 있는 지명인데, 모네, 파사로, 쇠라 등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단골 그림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해변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안경숙 <삶이 그림을 만날 때>, 24~26쪽 참조.)

그림이나 시는 우리에게 많은 소설을 쓰도록 도와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안경숙 작가의 상상력은 얼마든지 물음표(?)를 붙일 수 있을 만큼 기발한 착상이고 시나리오로 읽힌다. 하지만 그림 속의 남녀를 두고 ‘사생활’을 난 좀 다르게 이제 적고자 한다.

사생활이란 측면에서 남자의 ‘사’는 한자 ‘事’로 적고자 한다. 그러니까 ‘事생활’이 되겠다. 반면에 여자의 ‘사’는 한자 ‘思’로 쓰고자 한다. 그러니까 ‘思생활’이 맞겠다. 부연해서 설명을 하자면, 그림 속 남자는 일을 마치고 평온을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으로 보인다고 하겠다. 반면에 양산을 쓰고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은 저만치 보고픈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랑을 꿈꾸는 산책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저녁의 풍경을 보인다고 할까.

그림으로 잡히지 않은 ‘너머 풍경’의 끝에 다다르면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사는 집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삐걱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서 아마도 이렇게 인사를 집안에 누군가를 향하여 건넸을 테다. “다녀왔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이렇게 화답을 했을 테다. “다녀오셨어요.”

따라서 작업복을 입은 사내에게 저 길은 늘 다니는 퇴근길이고, 양산을 쓴 여인에게 저 길은 모처럼 여행지를 만나는 산책자의 길이지 싶다. 다른 것이다.

뒷짐을 지고 아주 천천히 한 발을 내딛는 남자의 작업복 색깔은 바닷물처럼 온통 파랗다.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의 잡초더미가 누렇게 변하는 것을 살피건대 계절은 어느새 여름에서 가을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남자는 아마도 마흔의 나이가 되면서부터 부지불식(不知不識)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저녁은 오”는 것을 몸으로 습관처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목숨 걸고 자본주의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하”는 너머 풍경을 이제야 바라보게 된다. “다녀왔습니다”로 하루의 노동을 갈무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카유보트의 그림을 이병률의 시를 가지고 보는 재미는 대중가요 가사가 되기도 하고, 뽕짝의 곡조가 되어 ‘나’를 문득 되돌아보게 한다. 좋은 그림, 좋은 시가 가지는 힘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사내라는 말, 그 서럽고도 차가운 낱말

뒷짐을 지고 저만치 여인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뒷모습으로 보여주는 작업복을 입은 남자는 ‘사내’라는 족속이다. 머리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시퍼런 색감이 뒷짐을 쥔 손을 서럽고도 차가운 인상을 남긴다.

이병률은 <바람의 사생활>에서 이렇게 ‘사내’를 두고 적어내고 있다.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길 위를 걷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시를 마무리한 바 있다.

사내라는 말이 처음 서럽게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 생각해 보면 내 나이가 서른 즈음이었을 테다. 서른이 되면서 나와 주변의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아내를 차례차례 맞이했다. 아내가 생기고 딸을 낳고 더러는 아들을 보면서 남자들은 철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다.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는 것을 문득 마주치게 된다. 마흔이 되고, 오십도 거의 끝날 무렵이 되면 이제는 어머니에게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함에 더욱더 서러워진다. 어디 그뿐인가.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다정하게 받아줬던 아내가 돌연 빈자리를 이별이나 사별로서 보이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다가 어쩌면 딸이나, 아들에게 던지게 되는데 문제는 어머니나 아내처럼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점점 더 만나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내가 ‘외면’한 까닭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나를 ‘외면’한 때문인지 좀처럼 분별이 되지 않아서 끝내는 알 수는 없지만 가장 서러운 사내의 시간이란 생각하건대 집에 왔을 때다. 그 누구도 내가 말한 “다녀왔습니다”에 화답해주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병률의 시 <외면>을 끝으로 여기에다 소개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그렇다. 마지막까지 외면하지 않을 관계가 있다면 나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이 점을 상기하면서 시를 읽으시라.

외면 / 이병률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밖에서 눈을

맞았다 무슨 돈이기에 문산까지 받으러 와야 했냐고 묻

는 것도 잊었다

친구는 돈이 없다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소주나 한잔하고 가자며 친구는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몸이 불편한 사내와 몸이 더 불편한 아내가 차려준 밥

상을 받으며 불쑥 친구는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고 친구는 그러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언 반찬그릇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흘끔흘끔 부부를 훔쳐볼수록 한기가 몰려와 나는 몸을

돌려 눈이 내리는 삼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은 사람

들은 까칠해 보였으며 헐어 보였다

받지 않겠다는 돈을 한사코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친구

와 그 집을 나섰다 눈 내리는 한적한 길에 서서 나란히

오줌을 누며 애써 먼 곳을 보려 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눈발 속에서 홍시만한 붉은 무게가 그의 가슴

에도 맺혔는지 묻고 싶었다


카유보트의 그림을 보면서 이병률의 시를 다시 천천히 읽었는데 이번에는 <외면>이 오랫동안 가슴에 ‘붉은 무게’를 드리웠다. 그러면서 시에 등장하는 ‘친구’라는 낱말에 새삼 스며드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렇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부는 친구처럼 지내야 한다.

“몸이 불편한 사내와 몸이 불편한 아내”의 관계가 참 단단하다. 촘촘하다. 외유내강의 모습이다. 여름이 다 갔다. 가을이 곧 온다. 머잖아 겨울이 닥칠 테다. 눈 내리는 겨울의 골목길에서 “나란히 오줌을 누며 애써 먼 곳을 보려”는 시선을 가져본 적이 나는 있다. 한 친구가 먼저 죽었을 때, 그랬다. 다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진짜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이 부부의 관계이고, 친구의 우정이지 싶다.

그렇다. 우리는 살면서 보기에 좋은 ‘저녁 풍경’만을 즐기려고 할 뿐, 좀처럼 보이지 않는 ‘너머 풍경’ 까지를 내다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외면하거나 혹 무시한다. 아무튼 그림이나 시에서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거나 익히고자 노력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이소영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알에이치코리아, 2020.

시라카와 시즈카, 심경호 옮김 <문자강화 1>,바다출판사, 2008.

안경숙 <삶이 그림을 만날 때>, 휴앤스토리, 2018.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