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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김형영 ‘꽃구경-따뜻한 봄날’과 바실리 칸딘스키 ‘말 탄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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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김형영 ‘꽃구경-따뜻한 봄날’과 바실리 칸딘스키 ‘말 탄 연인’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이 땅에 어머니들. 특히 해방과 전쟁을 겪으신 어머니들은 아들이나 딸에게 “우리 살아생전 허물과 죄악을/ 당신 품 속에 슬몃 밀어넣”을 줄 아셨던 성모 마리아와 같은 그런 존재일 테다. 그럼에도 자식들의 입장은 그저 “베옷 한 벌로 가리워드”리는 것으로, 49제로 산 자의 몫을 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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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구경―따뜻한 봄날 /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길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씩 한 움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나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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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말 탄 연인’,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독일, 뮌헨, 렌바흐하우스미술관.

“시는 우리가 시가 아니었다면 절대 볼 수 없던 것, 들을 수 없던 것, 만지고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게 한다. (중략) 어떤 시대에도 시가 물리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삶이 완벽히 다른 것이 되도록 구원한 적은 없다. (중략) 사실 우리가 믿은 것은 시가 가진 구원의 힘 그 자체라기보다는 구원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시를 읽거나 쓰는 일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도록 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조연정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255~256쪽 참조)

소리꾼 장사익, 애간장 녹이는 절창 ‘꽃구경’

올해 2월이었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시인 김형영(金炯榮, 1944~2021) 선생이 돌아가셨다. 그 즈음이다. 나는 방구석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소리꾼 장사익(張思翼, 1949~ )의 노래를 핸드폰 유튜브로 자주 본 적이 있다. 노래 ‘찔레꽃’,‘봄날은 간다’, ‘님은 먼 곳에’를 차례대로 듣다가 불현 듯 ‘꽃구경’에 가닿으면 가슴은 먹먹해지고 실컷 꽃구경 봄을 만끽하자는 옹골찬 슬픔과 노여움이 빚은 결의가 뭉치어 몽글몽글 꽉 차올랐다.

부고(訃告)를 알리는 문자 서비스가 잦은 여름이다. 칠월의 둘째 주. 화요일엔 내가 존경하는 선배님이 느닷없이 돌아가셔서 고려대 구로병원 장례식장을 갔고, 수요일엔 초등학교 반창 친구의 어머니가 임종하셔서 용인시 기흥장례식장을 찾았으며, 목요일엔 어릴 적 동네 친구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별세하셔서 수원시 연화장을 급기야 방문했더랬다.

모친상과 부친상을 겪은 친구에겐 어쩌면 김형영의 시가 위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선배 형님의 갑작스런 죽음에 형수님에겐 “머선 129” 식으로 말할 수밖에 나, 없다. 칠월의 셋째 주. 후다닥 일주일이 지났다. 문자로 “올 봄엔 형님과 꽃구경은 다녀오셨나요?”라고 적었다가 그만뒀다. 퍼뜩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게 무슨 위안을 전할까. 망설이던 차에 바실리 칸디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말 탄 연인>을 우연히 책에서 보았다. 순간, 이거지 싶었다. 책을 사진으로 찍었다. 문자 대신에 책속에 등장하는, 이 그림을 보내고자 한다. 그러면 모처럼 과거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환하게 한번쯤은 웃어 주시겠지.

미술사학자 이주은 교수가 쓴 <당신도, 그림처럼>은 <말 탄 연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말 탄 연인>은 회전목마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회전목마를 탔을 때 느끼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말 탄 연인>은 칸딘스키가 추상작업을 선보이기 이전에 인상주의 기법을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면서, 한 남자로서의 삶으로 보자면 미술계의 가장 지적인 남자로 알려진 그가 젊고 재능 있는 여제자와 사랑에 빠져 있던 시절에 그린, 로맨스의 흔적이 흠씬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말을 탄 연인의 뒤쪽 저 멀리에 연인들이 곧 도착하게 될 반짝이는 왕궁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말에서 내려 저기 저 왕궁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동화라면 ‘함께 말을 탄 왕자와 공주는 왕궁에 도착하여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결말이 나겠지만, 여기 있는 가짜 말들은 진짜 왕궁으로 달려가지 못한다.
(같은 책, 242~244쪽 참조)

어르신들, 그 누구에게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왕자와 공주가 순식간에 되는, 회전목마를 탔을 때 느끼는 꽃보다 더 반짝이던 환상의 그런 연애의 호시절이 있었을 테다. 물론, 결혼이란 현실이 우리를 회전목마에서 내리게 현실로 안내함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소리꾼 장사익이 부르는 ‘꽃구경’을 들으면서 아들은 말이 되는 등을 내주고, 등에 올라 탄 어머니는 아들의 등이 먼저 간 남편의 등을 닮았음을 발견하고는 흐뭇하고 훈훈하여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이어서 “좋아라고” 말하면서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로 말 탄 기분으로 기꺼이 들어서고자 할 테다.

아이구머니나

아들은 내 서방님이 아니고, 어머니는 내 애인이 결코 될 수 없다. 아들의 등짝에 올라타서 꽃구경하던 어머니가 돌연 소리를 내지른다. “아이구머니나”라고 냅다 외친다. 이에 화들짝 놀란 아들이 어머니를 살피니, 말이 없으시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는다. 여기서 말은 두 가지로 다가온다. 하나는 아들의 등짝이 말(馬)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함이고, 또 하나는 환상이 깨지면서 입을 다무는 말(語)을 의미한다.

한자 ‘어(語)’는 상대방이 말(言)을 던질 때 받아주고 거절할 수 있는 ‘나(吾)’의 존재감을 포함하는 뜻으로서 주로 쓰인다. 그런 차원에서 시에서 아들의 어머니는 돌연 침묵을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말 없는 대신에 어머니의 행동이 아들에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린 것을 모두 알게 된다. 아울러 숲길 땅바닥에 하나씩 “한 움큼씩 한 움큼씩 솔잎”이 뿌려지는 것을 발견한다. 이에 볼멘 목소리로 아들이 어머니를 향해 질문한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이렇게 물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침묵한다. 또 아들이 되묻는다.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두 번째 질문에도 어머니는 미동조차 없다. 여전히 응답이 없다. 아들이 답답해서 큰 목소리를 내서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그제야, 아들의 어머니는 침묵을 깬다. 그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숨죽이면서 조용히 속삭인다. 이렇게 말이다. 말하자면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했다. 여기서 어머니는 남편의 등짝을 닮기는 했지만 서방님이 아닌 아들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늙으신 어머니들이 그런 거처럼 괜한(?) 잔소리를 내뱉는다. 이렇게 말이다. 말하자면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하고 스르륵 눈 감고자 한다. 다시 한 번 더 어머니는 아들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시 속에 등장하는 모자 관계, 인연이 이 땅에서 깨지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들이 집을 잘 찾아가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해서 한 움큼씩 한 움큼씩 솔잎이 따다 가던 길 위에다 뿌린 것이다. 여태껏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은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아들을 자기 등에 업어 키운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기막힌 타이밍이기도 하다.

그렇다. 아들은, 내 서방님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애인이 결단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어쩌랴. 이제는 어머니를 ‘말 탄 연인’으로 아버지와 꽃구경을 하던 지난 봄날로 꿈꾸게 그냥 우리는 보내줘야 한다. 나는 이렇듯, 김형영의 시를 칸딘스키의 그림과 함께 읽고자 한다. 시와 그림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와 감상자의 몫이 되므로.

아무리 자식이 효자이고 효녀라도 할지라도 살아있을 적에 내 남편, 살아있을 적에 내 아내만 하겠는가. 생각하건대, 그와 같지는 구석구석 미치지 못할 테다.

대중에게 노래가 된 시,

아직도 대중가요로 부르지 못하는 진혼가


우리는 이미 앞에서 확인했다. 전북 부안 출신의 시인 김형영의 시 ‘꽃구경’이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로 처연하게 이 땅에 가득 울려 퍼진 것을 말이다. 이에 반해 전남 해남 출신의 시인 고정희(高靜熙, 1948~1991)의 명시 ‘수의를 입히며’는 아직도 노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뽕짝의 곡조가 어울려 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시의 전문은 이렇다.

수의를 입히며 / 고정희

논두렁 밭두렁에 비지땀을 쏟으시고

씨앗 여물 때마다 혼을 불어넣으시어

구릿빛 가죽만 남으신 어머니,

바람개비처럼 가벼운 줄 알았더니

어머니 지신 짐이 이리 무겁다니요

날아갈 듯 누우신 오 척 단신에

이리 무거운 짐 벗어놓고 떠나시다니요

이 짐을 지고 버티신 세월

억장이 무너지고 넋장이 부서집니다

구멍이란 구멍에 목숨 들이대시고

바람이란 바람에 맨가슴 비비시어

팔 남매 하늘을 떠받치신 어머니,

당신 칠십 평생 동안의 삶의 무게가

마지막 잡은 손에 전류처럼 흐릅니다

당신 칠십 평생 동안에 열린 산과 들의 숨소리가

마지막 포옹에 화인처럼 박힙니다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

나는 네가 머물 반석이 아니다

흘러라

내가 놓은 징검다리 밟고 가거라

뒤돌아보는 것은 길이 아니여

다만 단정하게 눈감으신 어머니

아흐,

우리 살아생전 허물과 죄악을

당신 품 속에 슬몃 밀어넣고

베옷 한 벌로 가리워드립니다

그래도 마다 않고 길 뜨시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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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카샛 ‘바느질하는 젊은 엄마’,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고정희의 명시 ‘수의를 입히며’는 대표작 표제시이기도 한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1987년)에 보인다. 아들로서 쓴 레퀴엠, 딸로서 써내려간 진혼가의 시가 동시에 1987년에 이 땅에 서점가에 처음, 와르르 쏟아져 나온 셈이다.

김형영의 시는 장사익에 의해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반면에, 고정희의 시는 아직도 노래가 되지 못해서 덜 알려진 편이다. 그럼에도 두 편의 시는 각각 아들과 딸의 입장이 되어서 어머니를 공통적으로 잃은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그게 퍽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친구 중에 아들에겐 김형영의 시 한 편을 앞으로는 노래와 함께 읽어주고, 딸에겐 고정희의 시 한 편을 곁에서 조용히 들려줄 테다.

아흐,

이 두 글자. 곡소리 울음소리는 여성이 아니면 친딸이 아니면 뱉어 내지 못할 진정한 외침이다. 또한 남성의 목소리로 따라하면 어딘가 어색하고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따라서 여성의 목소리로 이 시는 반드시 노래로 불러져야 할 것이다. 딸의 엄마가 된 가수 장윤정이 부른다면, 문득 상상해본다. 잘 어울릴 것이다.

미국의 인상파 화가. 메리 카샛(Mary Cassatt, 1844~1926)의 그림에는 유독 어머니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앞의 <바느질하는 젊은 엄마>(1892년 作 )를 고정희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보고 또 보았다. 시의 화자, 아니 모든 딸들의 기억에서 엄마란 늘, 항상, 언제나 그림처럼, 우아하고(?) 예쁜 모습(?)으로 각인되었거나 남았지 싶어서다.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고정희 시인이 소개하는 엄마는 “구릿빛 가죽만 남으신 어머니”의 모습을 초상화처럼 그려낸다. 그런가 하면, “팔 남매 하늘을 떠받치신 어머니”의 주름을 가만히 세어보게 만든다. 하나, 둘, 셋….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

나는 네가 머물 반석이 아니다

흘러라


이 석 줄의 시에서 “얘야,” 하고 건네는 그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다정한가. 바느질하던 젊은 엄마가 무릎에 팔을 괴고 정면을 향해 응시하는 눈동자가 똘망똘망한 여자 아이를 향해 금방이라도 말을 건넬 것만 같아 보인다.

담벼락은 외부로부터 침입과 위험을 방어하는 역할에 기능이 있다. 반석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다. 인생이란 징검다리를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딸에게 칠십이 되어서는 말을 바꾼다. 이제는 나를 놓고 너는 “흘러라”라고. 그동안 디딤돌이었던 엄마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니, 너는 “뒤돌아보는 것은 길이 아니여”라고 병색이 짙은 목소리로 귀띔한다. 이 심플한 말 한마디가 끝내 엄마의 유언이 되었다. 칠십의 엄마는 “다만 단정하게 눈감으”시며 숨을 거둔다. 임종을 맞이한다. 엄마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본 딸의 사무치는 외침의 목소리. “아흐,”

그렇다. 이 땅에 어머니들. 특히 해방과 전쟁을 겪으신 어머니들은 아들이나 딸에게 “우리 살아생전 허물과 죄악을/ 당신 품 속에 슬몃 밀어넣”을 줄 아셨던 성모 마리아와 같은 그런 존재일 테다. 그럼에도 자식들의 입장은 그저 “베옷 한 벌로 가리워드”리는 것으로, 49제로 산 자의 몫을 해낼 뿐이다.

친구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선배의 죽음 앞에서 나는 두 편의 시를 읽고, 두 점의 그림을 주말에 그저 읽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아버지들의 자화상, 성공의 정석

이유리 작가의 최신작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한겨레출판, 2020년)에서 의미심장하지만 애매모호한 문장을 발견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세상은 남편 돈 쓰는 아내에겐 무자비할 정도로 가혹하다. 반면 아내의 시간을 가로채는 남편에겐 너무나 관대하다. 아내의 삶과 시간을 많이 착취한 남편일수록 더 성공하게 되기에, 가부장 사회는 아내의 헌신을 더 독려하기도 한다.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은 ‘뱀과 사다리 게임’과 같다. 열심히 인생의 사다리를 올라가도 아내가 되는 순간 뱀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갈 확률이 높다. 바로 이것이 비혼 여성에게 ‘이기적’이라고 결코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이유다. 어느 누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겠는가. (같은 책, 154쪽 참조)

정말! 그럴까?

‘아내의 삶과 시간을 많이 착취한 남편’이란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구석이 없진 않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사회는 이미 2000년을 맞이하면서 다 사라졌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아내의 헌신’이나 ‘바느질하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담긴 그림은 이제 미술관이나 미술책에서나 흘낏 볼 수 있다. 지금은 아내가 더 돈 쓰는 시대이고, 남편은 돈 쓰는 권리도 함부로 주장하지 못하는 시대가 왔다.

숲으로 어머니를 등에 태우고 꽃구경 가자고 말할 아들도, 구릿빛 가죽만 남으신 어머니 임종 앞에서 “아흐,” 하고, 울어줄 딸을 쉽게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각박한 세상이 된 것 아닌가, 이는 그저 내 옹졸한 사견일 뿐이다.

◆ 참고문헌

김형영 <다른 하늘이 열릴 때> 문학과지성사, 1987.

고정희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오생근·조연정 엮음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문학과지성사.

이주은 <당신도, 그림처럼>, 아트북스 2009.

이유리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한겨레출판, 2020.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