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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최하림 ‘아내에게’와 칼 라르손 ‘신부(The B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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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최하림 ‘아내에게’와 칼 라르손 ‘신부(The Bride)’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결혼한 부부라면, 누구에게나 지난 세월 속에서 각자에게 떠오르거나 묻어나는 그림이 있을 테다. 지금 당신에겐 칼 라르손의 로 아내가 보이는가, 아니면 남편들이여 으로 아내를 계속 부인(否認)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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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 최하림

시간의 빗살들이 간단없이 흘러가던

성북역 철로변에 쑥니풀이 돋아나는 계절이면

고통의 씨앗들이 자라나 슬퍼지면서

우리는 언덕을 보았지 높고 둥근

언덕에서는 잡풀 향내가 코를 찌르고

가끔씩 파열음 섞인 아이들 함성이

하늘을 울리고 넘어가려 하는 햇살의

엷은 미소가 비친 이마에서

그림자들 넘실거렸지

나는 그 이마를 손등으로 쓸며

쉴 새 없이 입술을 댔다

손발을 가만히 쥐기도 했다

가을이 향기롭지요? 저기로 가봐요.

이리로 와봐요. 당신 손을 내 손에 얹어요.

우리는 손잡고 긴 길을 걸었지

긴 이야기했지

끊어지려 하는 현의 떨리처럼

삶은 아프겠지만 서로가 제 자신의

아픔을 아파하고 아파하는 마음들이

기도가 될 때 안식은 찾아올 거예요

우리는 손잡고 계속 걸었지

누이 같은 여자여, 끊어지려 하는 목소리로

그대는, 그러나 노래하지 않았지

계속 보기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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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르손 ‘신부(The Bride)’, 19세기, 수채화,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이 시대의 낭만가객이자 엄격한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황현산 교수의 비평집 <말과 시간의 깊이>(문학과지성사, 2002년) 서문에는 이런 글이 문득 보여 눈에 띈다. 다음이 그것이다.

“나는 분석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심리 비평이나 기호학 같은 ‘과학적’ 방법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방법들은 모든 것을 분류하고 분류된 것에 단일한 얼굴을 부여한다. 그 밑에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게다가 은폐되어 있다. 진정한 분석은 분석되지 않는 것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거기에 한 정신의 고통이 있고 미래의 희망을 위한 원기가 있다. 분석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 원기를 사랑하였다. 그러고 보면 나의 분석은 내가 말을 걸고 싶은 작가들에 대한 내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같은 책, 7쪽 참조)

내가 말을 걸고 싶은 시와 그림들

황현산은 시인 최하림(崔夏林, 1939~2010)을 두고서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미학자의 한 사람”으로 다정히 응시한 바 있는데, 최근에 <최하림 시 전집>을 가만히 만지면서 나의 시선은 자꾸만 그 말에 갇힌다. 그것을 얼핏 보았다. 예컨대 최하림 시인의 말부터 그렇다.

1990년대 중엽, 한 친구에게 근황을 적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유리창 가득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일어나, 건넛산에서 나무들이 기지개 켜고 일어나고, 골물이 졸졸졸 흘러내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풍경을 본다고. 때로는 비행기 같은 이물질이 지나는 것을 볼 때도 있다고. 그 같은 정경이 날마다 계속되는 가운데 서서히 여름이 가고, 나뭇잎이 져 내리고, 흰 눈이 내린다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배후 없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현재가 과거라는 시간의 그림자를 끌고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나 자신도 그런 그림자를 끌고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림자를 끌고 산을 넘고 넘어 어머니의 둥근 무덤으로, 어머니의 바다로 가고자 합니다. 나의 ‘창밖으로 세상 보기’는 어머니의 무덤과 바다를 보고자 한 여행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하림 <최하림 시 전집>, ‘시인의 말’, 5쪽 참조)

1990년대 중엽이라면? 시인의 나이가 오십하고, 중후반쯤 호시절을 가리킨다. 최하림은 우리 나이로 서른한 살(1969년) 때 결혼했다. 결혼식으로, 아내(장숙희 씨)를 정식으로 맞이했다. 상상컨대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시인이 만약에 수채화로 그림을 그렸더라면 아마도 신부의 모습은 스웨덴 화가 칼 라르손(Carl Larsson 1853~1919)이 여섯 살 아래의 카린을 아내로 맞이하며 그 아름다운 모습을 푸르고, 하얗게 붓질하여 화폭에 담았던 <신부>(1883년 作)와 흡사했을 테다. 칼 또한 카린과 서른 살, 즈음에 평생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최하림의 시 <아내에게>는 1988~1998년 사이에 발표한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결혼 20주년에서 30주년 사이로 분석되고 추적할 수 있다. 따라서 이쯤이 되면 결혼생활은 사막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끝없는 ‘고비’를 만나게 되어 있다. 또 어찌나 시간은 그리 빨리 흘러가던가. 그래서 시인은 “시간의 빗살들이 간단없이 흘러가던/ 성북역 철로변”에다 시선을 향한 것이다. 게다가 철로변에 아무렇게나 피어나는 들꽃들을 무심히 보지 않고 자세히 바라보면서 계절을 아파하면서 “고통의 씨앗들이 자라나 슬퍼지면서/ 우리는 언덕을 보았지 높고 둥근/ 언덕에서는 잡풀 향내가 코를 찌르고/ 가끔씩 파열음 섞인 아이들 함성이/ 하늘을 울리고 넘어가려 하는 햇살의/ 엷은 미소가 비친 이마에서/ 그림자들 넘실거렸지”라고 아내에게 애써 대화(~거렸지, 걸었지)를 이어가려고 노력한 것이다.

아무튼 좋은 부부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나란히 걷는 산책길을 참! 좋아한다. 결혼 10주년이 봄이라고 한다면 20주년은 여름이고 30주년이 지나면 완연한 가을, 50주년이 지났다면 겨울이 계절의 비유로 어울릴 것이다. 그렇다. 여름의 무더움과 고통을 잘 견뎌내야 한다. 그래야지 부부의 가을은 나뭇잎처럼 잘 물들어갈 수 있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시속에 화자(話者)의 목소리는 돌연 아내의 대화로 바뀌고 있다. 다음과 같다.

가을이 향기롭지요? 저기로 가봐요.

시인은 저 구절에다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손잡고 긴 길을 걸었지/ 긴 이야기했지/ 끊어지려 하는 현의 떨림처럼” 위태위태한 고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손잡고 계속 걸었지/ 누이 같은 여자여, 끊어지려 하는 목소리로/ 그대는, 그러나 노래하지 않았”지만 다행이도 나와 같은 방향을 “계속 보기만 했”으니. 그 다음 문장은 식상할 수 있어 부러 뺐다. 아마도 이런 말일 테다 “고마워요, 여보!”이지 싶다.

‘안해’, ‘아내’, ‘부인’ 그리고 ‘내 마누라!’에 대하여

이제 막 결혼하려는 청춘의 연인들이거나 혹은 결혼 10주년을 맞이한, 아직은 봄의 계절을 살고 있는 신혼의 부부들에게 추천한다. 좋은 책이다. 여기에다 소개한다. 이소영 작가의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알에이치코리아, 2020년)가 그것이다. 책에는 앞서 소개한 그림 <신부>가 등장한다. 그밖에도 그림만 보더라도 저절로 웃음이 묻어나고 부부 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따뜻한 그림들이 실은 차고 넘친다. 그러니 꼭 맛보시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최하림의 시가 생각났다. 찾았다. 서가에서 다시 꺼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病床(병상) 일기>, <아내가 없는 날> 등을 반복해서 자꾸만 보고 또 하염없이 읽어 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오래 전에 손끝을 떨게 했으며 내 지난 삶을 자꾸만 아프게 반성하게 만든 그림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의 <붉은 스카프를 두른 모네의 부인>(1873년 作)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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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붉은 스카프를 두른 모네의 부인’,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그림에 등장하는 창밖의 여자. 모델은 실은 모네의 아내 카미유이다. 창밖에서 애써 남편의 시선과 마주치려 하지만 이미 화가인 남편은 화폭의 오른쪽에서 숨어서 왼쪽으로 부인을 붓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주헌이 쓴 <이주헌의 ART CAFE-명화로 엿보는 세상 풍경>(미디어샘, 2016년)은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기쁨은 슬픔의 원인이다. 슬픔은 기쁨의 원인이다. 우리는 사랑했기에 미워한다. 미워했기에 사랑한다. 세상 어떤 일도 인과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그렇게 얽혀 있다. 문밖을 스쳐 지나가며 실내를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이를 잘 말해준다. (중략) 화가와 부인의 사이가 어떠했는지 우리가 잘 모른다 해도 이 그림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카미유는 밖에 있고 화가는 안에 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밖을 지나고 있고 그녀를 향한 화가의 시선은 무겁게 고정돼 있다. 무언가 서로 어긋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게 어긋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아내의 시선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당신이 미워요, 아니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서로 비껴가야 하는군요.”

조강지처였던 카미유는 이 그림이 완성된 지 얼마 안 돼 병으로 죽었다. 아내와 불화했던 화가는 아내 사후 이 그림을 줄곧 곁에 두었다. 그림 속 아내의 시선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에게 미움은 그렇게 절절한 사랑이었다.
(같은 책, 214~216쪽 참조)

그렇다. 부부의 시선이 교차하지 못하고 ‘불화’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해 사랑은 그만 미움으로 돌변하고 만다. 우리네 주변 부부들의 일상사와 겹친다.

나는 모네의 그림을 보면서 ‘안해’가 최근 섹스리스(sexless) 부부 중 여성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새로이 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어원은 내 심장 안에 뜬 해가 맞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뿐이 아니다. 불화하는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시간이 자꾸만 쌓이다 보면 시나브로, 아내라는 부인(婦人)은 부인(否認)하고픈 존재감으로 전락한다. 적어도 타인에게 존경의 대상으로 읽혀지는 부인(夫人)으로 보여야 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까닭에 부부의 섹스가 원만하면 “내 마누라”가 되고, 원만하지 못하고 불화하게 되면 “나(의), 안해”로 타인에게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결혼한 부부라면, 누구에게나 지난 세월 속에서 각자에게 떠오르거나 묻어나는 그림이 있을 테다. 지금 당신에겐 칼 라르손의 <신부>로 아내가 보이는가, 아니면 남편들이여 <붉은 스카프를 두른 모네의 부인>으로 아내를 계속 부인(否認)하고 싶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린 배우 윤정희(77)씨가 프랑스에서 방치된 채 생활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에는 윤씨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5)씨와 윤씨 형제자매 간 갈등이 작용했다. 치매라는 정신적 제약으로 일 처리 능력이 부족해진 윤씨를 대신해 법률행위를 할 성년 후견인을 누구로 지명할 것인지를 놓고 양측은 이미 프랑스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인 바 있다. 이 법정 다툼이 윤씨 형제자매 쪽의 패배로 결판나자 2라운드로 여론전에 돌입한 것이다. (<조선일보>, 2021년 2월 7일 참조)

삼자의 입장에서 기사를 보면서 느낀 점은 어쨌든 윤정희에 대한 부인(婦人)이 아니라 부인(否認)에 골몰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인데, 왈가왈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가 결혼 40년 차에 이르러서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모네의 그림으로 배경으로 한 것을 보고는 아연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진에서 부부는 또 얼마나 다정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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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11월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주최 제38회 영평상 시상식에서 공로영화인상을 받기 위해 참석한 배우 윤정희 씨와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 사진=뉴시스

아무튼 모네의 그림이 사진이 되는 순간. 활짝 웃고 있는 부부를 모네 부인이 꼭 지켜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 사진에서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시선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어째서 웃고 있는데도, 내 눈에는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림 한 점을 더 감상해 보자. ‘고비’와 ‘불화’를 겪고 있는 부부라고 한다면 이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마사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나는, 이 그림을 최근 미술평론가 유경희의 <가만히 가까이>(아트북스, 2016년)에서 처음 보고는, 오랫동안 책장을 덮지 못한 바를 스스로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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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테렌티우스 네오 부부의 초상’, 프레스코, 1세기경, 이탈리아,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

폼페이에서 발견된 남녀 초상화 또한 우리를 매혹한다. 폼페이의 테렌티우스 네오의 집에서 발견된 이 부부 초상화 (중략) 속 부부의 시선이 너무 자연스럽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먼저 우리를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시선은 그림 앞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하고, 자신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정면으로 그들의 시선을 감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이들의 ‘시선’은 ‘응시’로 전환된다. 시선은 그저 보는 것(look)이며, 시선과 시선이 만나면 응시(gaze)가 된다. 응시란 “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로마 시대 초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 그림 속 사람들이 감상자에게 보내는 시선이 좀 유별나다.
(같은 책, 41쪽 참조)

좋은 부부란, 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보는 시간의 계속


최하림의 시에서 독자라면 한번쯤은 느꼈을테다. 화자의 시선이 ‘응시’라는 것을 말이다. 말하자면 모네의 그림이 어둡고 그늘지게 보이는 까닭도 알고 보면 그렇다. 시선이 부부 사이를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부부란, 서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키스를 하면서 섹스를 나누는 행위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자 노력하는 것이고,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산책을 하면서 “우리는 손잡고 긴 길을 걸었지”라며 “긴 이야기”를 쓰는 서로의 응시 과정이 필요할 테다. 아무튼 “누이 같은 여자”인 이 땅의 아내들이여, 제발 “안 해”라고 외치지만 말고 당신의 남편에게 있어서 ‘평안을 주는 해결사(安解)’로 “계속 보”아주면 안 될까?

어쨌든 남편들이여, 내 아내에게 칠월에는 최하림의 시 한 편을 손글씨로 필사해서 칼 라르손의 그림과 모네의 그림과 더불어 네오 부부의 초상, 그림까지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의 밤이 오거든 꼭 같이 낭송하거나 필히 감상해 볼 일이다.

◆ 참고문헌


최하림 <최하림 시 전집>, 문학과지성사, 2010.

황현산 <말과 시간의 깊이>, 문학과지성사, 2002.

이소영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알에이치코리아, 2020.

이주헌 <이주헌의 ART CAFE-명화로 엿보는 세상 풍경>, 미디어샘, 2016.

유경희 <가만히 가까이>, 아트북스, 2016.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