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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이병률 '백년'과 페데르 크뢰이어 '힙! 힙! 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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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이병률 '백년'과 페데르 크뢰이어 '힙! 힙! 호레이'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즐기는 방법에 있어서 서양과 동양은 문화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 서양은 그림처럼 정원 가운데에 테이블을 펼친다. 소위 정자(亭子)가 없다. 함부로 잔디를 밟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술과 음식을 사람들과 기쁘게 나눈다고 한다면, 동양은 일찍부터 정원 가까이에다-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으려는 배려의 장치로서-정자를 예쁘게 지어다가 시와 노래, 술과 음식을 사람들과 기쁘게 나눈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 조금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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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 이병률


백 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게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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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르 세버린 크뢰이어, ‘힙! 힙! 호레이!(Hip hip hooray)’, 19세기, 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스웨덴 예테보리 미술관.


흙이 운동화 끝에 가만히 안기는 정원과 연녹색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경쾌한 낮은 언덕의 산책로. 미음완보(微吟緩步)를 즐길 수 있는 산책로가 옛집, 양반가옥 고택(古宅)을 두 팔로 휘감고 포근히 감싸준다. 그러면서 펼쳐지는 소나무의 숲길은 누구든 그곳에 가면 문득 걷고 싶어진다. 지난 토요일이었다. 새벽에 나는 집을 도망쳤다.

이윽고 목적지인 강릉 운정동 선교장(船橋莊)에 아침 9시쯤에 도착했다. 난, 두 번째로 방문이고 친구는 처음 방문하는 셈이었다.

1996년 6월, 신혼여행을 구실로 처음 가서 보고는 여적 그곳을 찾지 않았다. 애써 지나치려 했다. 한사코 외면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아픈 상처 때문이다. 나와 이혼한 그 사람과 추억이 있는 깃든 장소인 까닭에 으레 겁부터 냈을 테다.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난 심리적 상처. 상처를 조용히 다독여주는 한 권의 양서(良書)를 최근 짬짬이 독서하는 중이다. 화제의 신간 <정원의 쓸모>(윌북, 2021년)가 그것이다.

가정의 쓸모, 한자로 쓰인 말 ‘家庭’

책에서 이런 글과 반짝 마주쳤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용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정원과 자연이 사람의 행복과 정신 질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18세기 유럽에서 처음 조명을 받았다.” (같은 책, 52쪽 참조)

나는 이 문장에 하염없이 멈췄다. 오르락내리락 몇 번이나 반복해서 눈빛은 빙빙 어지러웠다. 손끝은 걸음걸이가 되어서 마치 산책하듯이 오래 서성였다. 그렇다. 멈추니까 힘이 생겨난다. 비로소 어둠 속에서도 빛이 보였다.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택(古宅)으로 손꼽히는 선교장(船橋莊). 선교장이 제안하는 산책의 코스를 따라서 한 바퀴 돌고 난 다음의 일이다. 우리는 숙박이 가능하다는 ‘홍예헌’ 툇마루에 땡잡은 것처럼 앉았다. 툇마루가 봄볕에 찜질방처럼 따뜻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는 나란히 흰색 아디다스 운동화를 벗고 있었다. 좋았다. 잠시 쉬어가는 그 황홀한 시간이.

툇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꽃밭과 벚꽃 핀 정원을 내다보고, 이색적인 ‘활래정’을 마주하면서 감상하는데 엉덩이가 뜨끈뜨끈, 무슨 무릉도원인가, 착각이 현기증처럼 일었다.

그 따뜻한 온기에 취해 이야기가 쏟아졌다. 차를 마시는 즐거움까지 더해서 우리는 오랫동안 툇마루에서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선교장의 역사가 300년, 그것을 기억에 되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럽과 강릉 선교장이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까닭에 18세기 조선 강릉의 한 양반가문은 충분히 조명을 받을 만하다. 가치가 있어서다. 다시 말해, 정원의 쓸모를 조선의 한 양반가문은 이미 알았고 몸소 실천했던 셈이다.

집(家)은 있으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원(庭園)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곳은 결코 ‘가정(家庭)’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점에 우리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집만 있고 나무와 화초, 채소가 자라나는 정원이 일체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함부로 ‘가정(家庭)’을 세웠다고 어디 논(論)할 수 있으랴. 그렇다. ‘가정’이란 한자의 낱말은 ‘집’과 ‘정원’이 나란히 같이 공존함에서 가치를 발휘한다. 이를 진정 뜻함이다.

자연이 내 집의 정원인양 좋았던 그 옛날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현대에는 아파트가 대개 ‘집’을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채마밭과 꽃과 나무가 있던 정원의 쓸모는 사라졌다. 깡그리 무시되었다. 다만 그 일부만이 아파트 베란다에 주목하여 미니 정원을 꾸미는 노력을 했으니 겨우 명맥(命脈)을 유지했을 뿐이다. 이러니 우리의 삶이란 미래로 향할수록 더욱더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안타깝다.

그러매, 정원의 쓸모는 부모의 입장이 되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곧 태어날 자녀를 위해서다. 작으나마 직접 손에 흙을 묻히면서 예쁘게 정원을 가꾸자. 다른 무엇보다 그것을 선행하도록 하자. 자녀교육에 실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세계적인 시인 워즈워스를 사랑하고 철학자인 프로이트를 연구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 치료사인 수 스튜어트는 책에 주옥같은 조언을 달았다. 다음이 그것이다.

“정원은 신체를 이완 상태로 이끄는 데 특히 효과적이다. 식물에는 때로 가시도 있고 독도 있다. 하지만 갑자기 움직이거나 달려들지 않는다. 따라서 그 속에서 일할 때는 주변을 경계하거나 등 뒤를 살필 필요가 없다. 나무들 사이에 부는 바람 소리는 또 다른 진정 효과를 준다. 이 소리는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소음을 걸러준다. 거기다 녹색을 볼 때는 눈에 조정 작용이 필요없다. 녹색이나 파란색은 자동적으로 각성 상태를 낮춰준다.” (같은 책, 89~90쪽 참조)

녹색과 파란색은 나무, 화초 및 각종 채소가 지닌 고유의 색깔을 말한다. 그것들은 탁 트인 정원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나는 편이다. 그러한 정원에서 가족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을 많이 누릴수록 좋다. 가정이 화목해져서다. 행복의 가능성이 성장한다. 결정적으로 내 인생까지도 봄날의 핀 꽃처럼 환하게 어쩌면 바꿔 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활력적인 생애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활력(活)이 오는(來) 것에 주목하여, 이씨 가문의 선조는 처음 선교장 집터를 신중히 구하고 마침내 가옥을 완성했던 것이다. 더불어 커다란 마당에다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그 주변에 배롱나무, 동백꽃, 매화, 벚꽃, 대나무 등의 온갖 녹색 식물을 심었다. 그러고는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을 부러 배치한 것이리라. 아래의 사진을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원이면서 또한 실용적인 정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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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운정동 ‘선교장’ 활래정의 전경.


18세기의 파티!

유럽은 장미, 꽃 피는 마당

조선은 부용, 꽃 보이는 정자


앞의 그림은 노르웨이 출신의 덴마크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øyer, 1851~1909)가 몇 년에 걸쳐서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한편의 영화가 얼른 베꼈던 바이다. 필름에다 슬그머니 가져다가 사용했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영화 속 명대사이다. 참고로 영화의 제목은 <마리 크뢰이어>(2012년 作)이다.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어’라는 유명한 화가의 아내이자 뮤즈인 ‘마리’를 열연한 배우의 이름은 ‘비르기트 요르트 소렌슨’이라고 한다. 무튼 그녀가 영화에서 외친 명대사는 우리로 하여금 가슴을 흠뻑 적시게 한다. 나는 이 명대사를 이렇듯 고치고 싶었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줄 수 없지만,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은 가족에게 언제나 행복을 준다”라고 말이다.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을 즐기는 방법에 있어서 서양과 동양은 문화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 서양은 그림처럼 정원 가운데에 테이블을 펼친다. 소위 정자(亭子)가 없다. 함부로 잔디를 밟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술과 음식을 사람들과 기쁘게 나눈다고 한다면, 동양은 일찍부터 정원 가까이에다-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으려는 배려의 장치로서-정자를 예쁘게 지어다가 시와 노래, 술과 음식을 사람들과 기쁘게 나눈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 조금은 다를 뿐이다.

다시 그림을 보자. 그림에서 여자들(아이 엄마들)은 앉아서 짙어진 녹색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과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서로 건배를 속삭인다. 이와 반대로 남자들(아이 아빠들)은 각양각색의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고는 모두 일어나서 “만세(힙)! 만세(힙)! 만세(호레이)!”를 큰 목소리로 외치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실제로 있었던 광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장소는 화가 크뢰이어의 친구인 앙케 부부가 고생 끝에 커다란 정원이 딸린 집을 얻어서 축하하는 집들이하는 장면을 기념하여 붓질하여 화폭에다 담아낸 것이다. 이와 관련, 좋은 책, <화가들의 정원>에는 인상적인 글이 등장한다. 여기에다 소개한다. 참고로 ‘스카겐’이란 지명(地名)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덴마크의 한 바닷가 마을의 이름이 ‘스카겐’인 것이다.

모래 언덕과 탁 트인 풍경, 청명한 빛이 있는 이 모래 반도는 젊은 예술가들을 매료시킬 만했고 지금도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원하는 유럽 곳곳의 사람들이 스카켄을 찾고 있다. (중략) 크뢰이어는 1882년 6월 스카겐에 처음 왔을 때 이미 성공한 화가였다. (중략) 작은 시골 마을의 생활에 정원 가꾸기는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안나 앙케와 미카엘 앙케 부부는 1884년 5월 1일 안나 부모님의 브륀둠스 호텔에서 멀지 않은 마르크바이가 2번지의 집을 매입했다. 부부의 이사를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이 모여 야외 오찬을 가졌다. P.S. 크뢰이어가 그때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그림 <HIp, Hip, Horrah!>이다. 새집에는 채소를 키우고 야외에서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주 넓은 정원이 있었다. (중략) <만세, 만세, 만세!>는 1888년 브륀둠스 호텔 정원의 작업실에서 완성되었다. (재키 베넷 <화가들의 정원>, 225~229쪽 참조)

나는 강릉 선교장 활래정에서 그 언젠가 옛 조선의 사대부들이 모여서 시와 노래, 술과 음악을 즐기며 놀았던 과거를 상상해 보았다. 상상하는 그 시간은 갓 지은 밥처럼 맛있고 달콤했다. 그러면서 생각난 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병률(1967~ ) 시인의 ‘백 년’이 그것이었다. 명시 ‘백 년’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4, <눈사람 여관>을 펼치면 3분의 2쯤에 나오면서 보인다.

발문(跋文·책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저자 혹은 저작물에 대한 품평를 간략하게 소개하여 적은 글을 말함)은 시인 유희경이 적었다. 다음과 같다.

“시는 사랑을 향한다. (중략) 시는 어떤 결과나 완성을 목적으로 두고 꾸며대는 쓰기가 아니다. (중략) 시는 언제나 결핍되어 있다. (중략) 이병률은 덧칠하지 않는다. (중략) 사랑했으므로, 더 알고 싶거나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이다. (중략) 시인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듣는 사람이다. 듣고 적는 사람이다”라는 촌평에 나는 몇 차례 반복해서 연필로 밑줄을 긋고 힘을 주고 있었다.

특히, “시인은 듣는 사람이다. 듣고 적는 사람이다”라는 글에서는 매혹되어 나,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던가. 그렇다. 저 ‘백 년’이란 시는 추측하건대 어느 바닷가 마을, 혹은 어느 옛날부터 존재했던 고택의 정원 마당에서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시인이 귀에 들린 것을 고스란히 받아쓰기 하듯이 적은 것일 것이다. 이렇듯 시가 만져지면서 와락 느껴졌다. 한마디로 ‘백 년’은 차곰차곰하다. 차갑고 시원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좋은 시를 특히 신혼의 부부에게 추천하고 싶다. 왜냐하면 ‘백 년’을 살 것처럼 집을 구하고 정원을 가꾸면서, ‘백 년’을 살 것처럼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당부하고 싶어서다.

아무튼 ‘백 년’이란 시를 반복해서 몇 날을 나, 읽고 또 읽었던가. 어느 날인가, 시에서 화자가 꽃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서 막 태어난 아이를 두고서, 꽃과 나무가 고백을 하듯이 바람에 속삭이듯 담담하게 하나하나 매듭을 푸는 사랑의 서사! 그 고백!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심은 모종의 나무가 “백 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이 자꾸만 들렸다. 내가 성인이 되는 스무 살 까지, 그 꽃과 나무는 문득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라면서 나의 성장 과정을 지켜볼 것만 같았다. 그런가 하면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라는 시구에선 결혼 적령기 내게로 와서 집을 내가 떠날 때까지 늘상 붙어서 다니자고 더러는 분분한 꽃잎으로, 퇴색한 나뭇잎으로 내 어깨에 안겨서 조용히 안부를 묻는 듯 시가 보였다.

사임당의 뜰, 동네방네 예쁜 정원 가꾸기

1박 2일의 강릉 여행.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친구에게 이런 글을 보내고자 휴대폰에다 메모한 바 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벗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심우(心友)와 면우(面友)다. 심우는 선한 일을 하면 기뻐하고 과실이 있으면 타이르되, 귀천을 불문하며 어려움을 당해도 늘 한결같고 분함과 욕심을 자제할 줄 아는 마음의 친구다. 반면 얼굴로 사귄 친구, 즉 면우란 나보다 똑똑하면 시기하고 과실을 발견하면 크게 드러내며 술자리에서는 형제처럼 하지만 이해타산에서는 지극히 냉담한 데다 귀하면 후대하고 천해지면 홀대하는 사람이다.” (홍인희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124쪽 참조)

“강릉서 양반 자랑 말고, 원주서 글 자랑 마라”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럴 만큼 그 고장에는 양반이 많으며 글 읽는 선비가 수두룩하다는 뜻이다. ‘강릉’이란 바닷가 도시 하면, 떠오르는 역사 속 여성 인물이 신사임당일 것이다. 신사임당의 외가 쪽 3대조가 되는 최응현의 벗에 대한 정리가 아주 깔끔하다. 마음에 쏙 든다.

나이가 서른이 지나 마흔도 보내고, 오십 후반 뒷골목에 이른 나이에도 울림은 여전하다. 계속 커진다. 그러므로 부지불식 나, 사시나무처럼 두려움으로 오들오들 떤다. 나는 과연 어떤 친구일까, 하고 ‘나’를 반성케 하니 하는 말이다.

어머니로서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 이이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는 미술사학자 탁현규가 쓴 <사임당의 뜰>(안그라픽스, 2017년)이란 책을 방구석에서 애독한 바 있다. 그러면서 자녀교육의 성공 비밀이 수많은 전칭작으로 일컬어지는 오이, 수박, 양귀비, 원추리, 맨드라미, 여뀌, 추규, 수박꽃, 가지, 양귀비, 봉선화와 같은 식물을 그린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새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손수 가꾼 식물들의 천지인 강릉의 집, 정원을 보면서 딸과 아들은 48세,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정원의 꽃과 나무를 보면서 늘 곁에 모친이 있는 것처럼 백 년을 살 것처럼 꽃과 나무들을 향하여 대화하고 정원의 마당을 가로지르면서 슬픔과 기쁨 등에 대하여 울고 웃으면서 마냥 하소연을 혹 하지는 않았을까, 감히 억측을 해본다.

아무튼 내 집 정원의 쓸모는 참으로 다양한 편이다. 그 중에서도 자녀를 키우는 우리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신사임당은 실천했고, 우리들은 아직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을 뿐인데 이것이 중요하다. 성공적인 자녀교육법 핵심에 ‘정원의 쓸모’를 이제라도 생각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마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원의 마당이 아예 없는 아파트 거실은 사랑방의 공간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들은 심리적으로 잦은 스트레스를 겪게 될 것이다.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두뇌에 독소가 된다. 스트레스는 새로운 학습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인생의 풍성함과 의미도 잃게 만든다.” (수 스튜어드 스미스 <정원의 쓸모>, 91쪽 참조)

내 아이의 두뇌를 걱정하고 있다면 당장 아파트의 베란다로 나아가서 너저분한 창고를 치우고 예쁜 정원을 만들 궁리부터 해보자. 사임당처럼 자녀교육을 해보는 것이다. 여하튼 사임당의 후손들이 ‘나’부터 먼저 되어 보는 것이다.

아파트의 베란다처럼 작은 공간을 각종 식물이 가득한 뜰로 바꿔 놓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사임당의 후손들이다. 아침마다 화분에 물주는 정성이 아직 남아 있는 한국인은 우리 시대의 초충도를 그릴 힘이 있다. 그런 힘을 복돋워 주는 선배가 바로 사임당이다. (탁현규 <사임당의 뜰>, 199쪽 참조)

결론은 이렇다. 시인의 시처럼 ‘백 년’을 내다보고 지금부터 내 곁에 있는 가족을 챙기고 사랑부터 해볼 일이다. 내 집은, 즉 ‘가(家)’만 있고 ‘정(庭)’이 없으면 남의 집이 된다. 결코 내 집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어떻게 하면 베란다를 창고로 방치하지 않고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쓸모 있게 만들 것인가. 이에 대해 신혼의 부부는 거듭 고민하고 자녀 계획을 세워 볼 일이다.

강릉 바닷가의 옛 이름 ‘하슬라(河瑟羅)’

덴마크 바닷가 화가들의 마을 ‘스카겐’


선교장에서 정동진 방향으로 쭉 내려가다가 보면, 아름다운 예술정원 미술관 ‘하슬라아트월드’가 나온다. ‘하슬라’는 고구려 신라 때 부르던 옛 강릉의 이름이라고 한다.

강릉 하슬라는 이름처럼 해와 달이 뜨고 바다와 산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고 있다. 이 책은 하슬라아트월드라는 복합 문화공간을 만들고 기획하면서 경험한 이 지역의 자연에 대한 감동과 강릉의 동네방네와 나와의 교우를 꿈꾸며 정리한 것이다. (박신정 <동네방네 미술관 이야기-사임담이 걷던 길>, 11쪽 참조)

예술정원 하슬라아트월드를 만들고 운영하는 예술가 박신정(1961~ ) 대표의 말이 무척 인상적이다. 박신정의 책을 통해 나는, 강릉 바닷가 마을 동네방네에 더욱더 놀러가고 싶은 충동과 유혹에 자꾸만 빠져든다. 그곳으로 자주 놀러갈 것이다. 마치 덴마크 바닷가 화가들의 마을 ‘스카겐’이 그곳 강릉에 머잖아 곧 들어설 것 같은 환상을 꿈꾸면서.

1박 2일 강릉 여행.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강문 해변을 친구와 나란히 산책을 하면서 보여주고픈 크뢰이어의 그림을 여기에 하나 더 소개한다. 다음이 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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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르 세버린 크뢰이어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카겐 박물관.


망상증에 시달렸던 천재 화가 P.S. 크뢰이어가 그린 작품 중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두 여성이 스카겐 해변을 걷고 있는 뒷모습을 포착한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이란 작품이 있다. 왼쪽 여성은 아나 안셰르, 오른쪽 여성은 마리 크뢰이어다. 관습과 싸우며 예술가로 살기를 선택했던 여자와 사랑에 모든 걸 걸기로 선택했던 여자. 이들의 녹록지 않았던 생애가 하늘거리는 하얀 드레스 자락에 포개져 알 수 없는 비애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또한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지가 그의 생애의 범위를 결정한다고. 우리는 결코 믿은 만큼 하는 것 아닐까 하.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59쪽 참조)

이 그림에서 나는 이병률 시인의 ‘찬란’이 순간 포착되었다. 아무튼 ‘찬란(燦爛)’에 대하여 다음 여행 때, 친구에게 반드시 그림과 곁들여 시를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의 의자, 혹은 고택의 툇마루에서 앉아서 찬찬히 읽어줄 것이다. 시의 끝은 이렇다.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아무튼 ‘찬란’이란 시를 읽고 이어서 ‘백 년’을 읽어야 한다. 또한 ‘정원’부터 먼저 산책하고 나중에 바닷가로 산책을 나서는 것이 더 찬란한 체험이 되지 싶다. 어때 친구?

◆ 참고문헌

이병률 <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사, 2013.

이병률 <찬란>, 문학과지성사, 2010.

재키 베넷, 김다은 옮김 <화가들의 정원>, 샘터, 2020.

수 스튜어드 스미스, 고정아 옮김 <정원의 쓸모>, 윌북. 2021.

박신정 <동네방네 미술관 이야기-사임담이 걷던 길>, 하슬라, 2016.

탁현규 <사임당의 뜰>, 안그라픽스, 2017.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은행나무, 2019.

홍인희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교보문고, 2011.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