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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문정희 "응"과 르누아르 '부기발에서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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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문정희 "응"과 르누아르 '부기발에서의 춤'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오십이 넘어서 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술 한 잔 하자는 그런 얘기다. 그러니 함부로 오해하지는 말자. 그럴 때엔 언제나 짧게 “응”하고 바로 응답하자. 이런 사이가 되는 친구가 한 사람쯤 내 주변에 있다고 한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혼자는 안 된다. 항상 즐거움은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하는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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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부기발에서의 춤’, 19세기, 캔버스에 유화, 보스턴미술관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 안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것이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팡세>에서 했던 말이다, 라고 인문학자 김경집은 <인생의 밑줄>에 적었다. 무언(無言)을 종용하는 코로나 인 코리아. 그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억지춘향으로 방 안에 스스로 갇힌 나는 정말 행복한가. 거꾸로 불행은 크리스마스이고 곧 연말인데 과연 멈추고 저만치 물러선 것일까.

어쨌거나 방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마주치는 그 시간은 행복하다. 독서와 섹스는 체위가 엇비슷하다. 그 시간이 많아질수록 체위가 얼마든 다양해진다. 엎드려서 혹은 누워서, 아니면 침대나 의자 소파 등에 걸터앉아서. 화장실 혹은 자동차 등에서 “너와 내가 만든/아름다운 완성”을 맛보기가 안성맞춤 용이하다.

“응”, 긍정과 사랑이 듬뿍 담긴 낱말!

문정희(文貞姬, 1947~ ) 시인의 “응”은 <나는 문이다>(뿔, 2007년)에 처음 보인다. 시인이 나이로 환갑(61세) 즈음에 쓴 시로 짐작된다. 막상 나도 그 나이가 얼추 가까워지니 이제야 시가 얼핏 보인다. 그림이 바람처럼 들렸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의 <부기발에서의 춤>(1883년 作)이 그것이다. 참고로 부기발(Bougival)은 지명이다. 수도 파리 근교, 센 강을 끼고 그 마을(부기발)이 실은 있단다. 19세기 중엽, 화가·시인·작가 등이 대거 어울리고 이웃으로 살았단다.

세로 크기로 그려진 르누아르의 그림을 시계 방향(반대)의 가로로 돌리면 남녀의 합궁(合宮). 그 뜨겁고도 설레는 황홀한 섹스 체위가 관객의 아랫도리를 야릇하게도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그래서다. 섹스에 굶주린 남녀가 쉽게 사교춤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림과 같이 남녀가 되어 춤을 출 수 있다면, 상대의 손끝만 막 잡아도 가슴이 쿵쾅 떨린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이 전하는 사랑의 신호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여자는 남자의 물건이 두들기는 밀어(密語)로 인하여 얼굴이 흥분의 핑크빛으로 매료된다. 남녀 모두 춤추는 발이 허공에 붕 뜬 기분을 만끽하게 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오른 손에 힘을 주며 여자를 당기면서 “오늘 밤?”하고 그러면, 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여자는 금방이라도 “응”하고 답할 것이다. 우유 빛 하얀 살결, 풍만한 몸매, 핑크빛 드레스와 빨간 모자. 검정 정장 차림, 구레나룻 수염, 은행나무 잎 빛깔의 중절모의 늑대 눈빛은 감상자의 상상에 그저 맡길 일이다. 다 필요 없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내가 살아 있다는, 그 느낌은 언제 어디서 오는가. 남녀의 살맛(?)이 아닌가. 말하지 않음이 곧 말함이 되는 소통의 시간. 그것은 독서와 섹스가 서로 묘하게도 닮은 점이다.

우리가 긍정적이거나 사랑이 충만할 때, 내뱉는 모든 말들은 어쩌면 “좀 더 영혼적인 것, 좀 더 체온적인 것이 섞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날,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에 있어서 문정희의 “응”은 힘과 용기를 전송하기에 희망적이다. 그 긍정적이면서 사랑스러운 “응”이란, “나에게서 말을 없애버리고 나면 나는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문정희 <살아 있다는 것은>, 286쪽 참조)로 삶이 그만 재미가 없고, 시들해지는 것이다.

“흥”이란 낱말의 신세계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같은 글자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긍정과 사랑으로 보면 “응”이 되나 부정과 의심으로 보자면 “응”으로 보이지 않고, “%”로 볼 수도 있음이다. 그런가 하면, 남녀의 완벽한 결혼생활은 “응”이란 글자에 멋쟁이란 모자(ㅗ)를 쓰게 한다. 그리하여 “흥”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남녀의 위치를 하늘과 땅 식으로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이치를 섹스 체위로 여러 번 우리는 이미 경험해 보았기에 다 알고 있다. “너 위에 떠 있”고 “나 네 아래 떠 있”는 위치는 고정적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내친 김에 시가 연상이 되는 그림을 하나 더 감상해 보자. 르누아르와 또래인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의 대표작이기도 한 <해돋이>(1872년 作)가 그것이다. 미술사 연구자, 아키타 마사코(秋田麻旱子)의 한국어판 <그림을 보는 기술>(까치, 2020년)이란 신간에도 이 그림이 등장한다. 반가웠다. 여기에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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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해돋이’,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마르모탕미술관


어디에서부터 보아야 할까요? 콘트라스트가 강한 지점은 검은 배입니다. 하지만 일출의 붉은 색도 눈길을 끕니다. 태양의 붉은 덩어리가 혼자 떠서 눈길을 끌므로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겠습니다. 그러면 수면에 비친 오렌지색이 밑으로 향하며 배와 연결되어 거기에서부터 짙은 남색의 점이 줄줄이 이어지고, 뒤쪽의 배로 시선이 향합니다. (같은 책, 90쪽 참조)

이 그림을 보면서, 나는 문정희의 “응”이란 시가 연상이 되었다. 수평선을 중심으로 일출의 붉은 동그란 해와 수면에 세로로 꼬리처럼 퍼진 오렌지색을 연필로 선을 그어보니 역시 “응”이란 글자 모양이 생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화면에서 가장 가까운, 선명한 빛깔의 검정색의 배에 남녀 커플이 보였다. 그러면서 나는 저 커플의 속삭이는 밀어가 들렸다. 그것 역시 “응”이란 말!

그렇다. 그림 속의 남녀는 배를 저어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에 도착할 것이다. 점점 더 크게 붉어지는 일출을 보면서 미래의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을 간절히 바라고 꿈꿀 것이다. 설령 해를 보는 신년의 일출이면 어떻고, 또 환한 달빛을 같이 바라보는 제야의 밤이면 어떠한가. 그들은 아마도 서로 “뜨거운 대답”을 할 것이다.

“응”

이 말을 오랫동안 함께 나누면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어깨를 도닥여 줄 것이다. 그렇다. 부정의 생각이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뀌고 무관심이나 질투가 사랑으로 변하는 시간이 허락되고 내게도 온다면 우리는 누구나 “흥(興)”이 일어나고, 살맛나는 세상을 현실로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은 날이 오거나, 친한 친구와의 관계 회복이 필요해지는 날이 들면 긍정적이고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문정희의 “응”을 즐겨 찾는다. 시를 읽는다. 동시에 앞에 소개한 르누아르의 그림과 모네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한다. 그러면 이것들이 어느 샌가 내 상처들을 가만히 만져준다. 지친 내 영혼을 조용히 달래준다. 치유해준다. 이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습은 하나의 모습만은 아니다. 어떤 모습이, 언제, 누구에게 보여줬느냐에 따라 사람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춰진다. 나의 부모님이, 친구들이, 선생님이, 직장 상사가, 또 날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고 나 자신이 보는 모습은 각각 어떤 시각으로, 또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다. (노엘라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192쪽 참조)

바이올린 연주자로 음악, 그림, 글 등의 다양한 예술적 소재를 통해 끊임없이 글을 쓰는 노엘라는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에서 르누아르 그림 속 여성에 주목한다. 그림 속 여성은 프랑스 화가인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이라고 한다. 노엘라는 책에서 르누아르가 그린 발라동과 로트레크가 그린 발라동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여주는데, 꽤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동일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완전 딴판으로 인물이 다가왔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고, 그 여자는 술로 늙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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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틀루즈 로트레크 ‘숙취’, 19세기, 로트레크미술관

쉬잔 발라동. 그녀는 동시대 남자 화가들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다. 뮤즈였다. 남성의 심장에 아니마(anima) 역할을 했다.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에서 많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사랑을 나눴다고 한다. 그녀가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을 때는 우아하고 섹시한 미모로 돋보였으나, 그녀가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로트레크가 그린 <숙취>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전한다.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로 테이블에 왼팔을 놓고 세워 의지하며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침울하고 고독해 보인다. 망연자실하는 분위기가 쓸쓸하게 그려졌다. 유리잔에 남은 저 술은 양주일까, 위스키일까. 아니면 맥주일까.

어쨌거나 술은 망우물(忘憂物)이라고 했다. 자고로 나의 근심을 풀어내기엔 이만한 최적의 물건도 없다. 그렇기에 주당들은 너나없이 누가 부르지 않더라도 날이면 밤마다 술을 찾아가는 것이다. 술 없이는 단 하루도 버텨내고 살 수가 없기에.

사랑을 잃고, 남녀가 처음 하는 행동에도 항상 술이 먼저이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 로트레크가 그린 쉬잔 발라동의 모습은 춤을 출 때의 행복해하는 모습과는 완전 딴판으로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술맛처럼 씁쓸하게 느껴진다.

혼자 마시는 술, 이것을 독작(獨酌)이라고 한다. 독(獨)은 자칫 ‘독(毒)’으로 연결된다. 위험하다. 약(藥)이 되려면 둘이서 마시는 대작(對酌)을 습관으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셋은 어떠한가. 그것을 일러 품작(品酌)이라고 말한다. 대작은 ‘대화’가 있는 술자리이고, 품작은 ‘품격’을 갖춘 술자리를 말함이다.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오십이 넘어서 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술 한 잔 하자는 그런 얘기다. 그러니 함부로 오해하지는 말자. 그럴 때엔 언제나 짧게 “응”하고 바로 응답하자. 이런 사이가 되는 친구가 한 사람쯤 내 주변에 있다고 한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혼자는 안 된다. 항상 즐거움은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시 한 편 읽은 날은 삶의 밀도가 달라진다”라고 했다.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니다. 그런데 어디 그게 시(詩) 뿐인가. 더 있다. 좋은 그림 한 점도, 심지어는 음악 혹은 영화 한 편을 만나게 되면 내 몸 속의 온갖 근심이 꺼내지고 풀어진다. 맥없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2020년 마무리!

코로나로 방 안에 들어앉아 이웃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행복을 나누고 느끼길 그저 바랄 뿐이다. 내 안의 ‘너’라는 동그란 해와 둥그런 달을 되찾길 철없이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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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문정희 <나는 문이다>, 뿔, 2007.

문정희 <내 몸속의 새를 꺼내주세요>, 파람북, 2018.

문정희 <살아 있다는 것은>, 생각속의집, 2014.

노엘라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나무수, 2010.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그림을 보는 기술>, 까치, 2020.

김경집 <인생의 밑줄>, 한겨레출판, 2019.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