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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조향미 ‘못난 사과’와 폴 세잔 ‘과일이 있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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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조향미 ‘못난 사과’와 폴 세잔 ‘과일이 있는 정물’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성취한 사과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은 열매인 과일 사과를 만지는 손의 모양으로 둥글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둥근 손으로 예배”하듯이 지나쳐온 사과(師果)를 향해서 “하느님”에게 감사를 전하는 겸허한 ‘나’와 마주치고 있다

못난 사과 / 조향미

못나고 흠집 난 사과만 두세 광주리 담아 놓고

그 사과만큼이나 못난 아낙네는 난전에 앉아 있다

지나가던 못난 지게꾼은 잠시 머뭇거리다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 짜리 한 장 꺼낸다

파는 장사치도 팔리는 사과도 사는 손님도

모두 똑같이 못나서 실은 아무도 못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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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과일이 있는 정물’,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파리오랑주리미술관.


시가 참! 선(善)하다. 따스해서 정(情)이 입에서 가슴께까지 한참이나 뭉근해진다. 갈바람이 부는 때, 읽으면 시린 마음이 홀연 가신다. 부산 만덕고등학교 국어교사이자 등단 시인이기도 한 조향미(1961~ )의 ‘못난 사과’는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 전문이 실려 있다.

글자 없는 책(無字之書)도 읽어라

자칫 우리가 놓치고 무시해 버린 일상. 이러한 뒷골목 풍경과 사회현실을 직시하여 시와 그림으로 오롯이 깁는 시인과 화가를 통해서 나는 또 배운다. 방구석에 앉아 책만 읽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사람도 좀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이따금 호젓하게 자연의 산수(山水)를 가까이서 보고 즐기는 것들이 ‘글자 없는 책(無字之書)’를 잘 읽는 방법이라고.

앞의 세잔의 그림을 보자. 그 어디에도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글자 없는 그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미술수업을 선생님께 듣기만 하는 고등학생이 아닌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단순한 먹는 사과로만 보였던 것이 어른이 되어서는 특별하게 뭔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식탁 위에 탱탱하고 윤기 있는 사과를 보고 먹는 것에 상식적으로 익숙한 나머지, 내가 놓치고 만 것은 ‘식상함’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나는 나인데, ‘개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또한 ‘관계’와 ‘조화’를 이룸이 그림 속 사과만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사회에 내딛는 태도인데, 그것을 나는 의식하지 않고 혼자 잘 났다고 살았던 것만 같다.

‘사과’를 보면서도 친구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사과’를 할 일이 많음을 전혀 몰랐다. 다행이도 나는 이제 ‘사과’를 만나면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일부터 찾는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게 사과하고자 말이다.

사과 그림 하면 화가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음은 이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과할 일이 있거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엔 ‘그’에게 장문의 편지 글을 달지 않고, 달랑 그림 사진 한 장을 보내려고 한다. 글자 없는 그림을 제대로 읽고 받아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고 몫이니 나로서는 한결 홀가분해 질 것이다.

그 사과만큼이나 못난 아낙네는 난전에 앉아 있다

시 한 줄에서 나는 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그림 <앉아있는 여인>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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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61년, 캔버스에 유채.


조향미 시인이 보았다는, 난전(亂廛)에서 사과 파는 ‘못난 아낙네’의 모습이란 상상하건대 그림 속 아낙네와 같이 닮지는 않았을까.

아무튼 시와 그림에서 ‘소확행’이라는 것이 읽힌다.

작은 것에서 큰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

시를 정확히 읽어 내는 분으로 유명한 시인 신경림(申庚林, 1935~ ) 선생은 ‘못난 사과’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시에서 세련된 말의 재미나 고도의 정신세계의 흐름을 찾으려는 독자들은 발상이 너무 범상하고 작법이 단순 소박해서 불만스러워할는지도 모를 시다.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평범하디 평범한 거리의 사과 장수 아낙네에게서 이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과 장수 아낙네만큼이나 몸을 낮추어야 비로소 가능(신경림 <시인을 찾아서> 623쪽 참조)하다고 적은 바 있다. 이에 나는 연필에 힘을 줘가면서 밑줄 긋고 있었다.

그렇다. 아낙네와 지게꾼 사이 오가는 거래에 툭 끼어들어서 “파는 장사치도 팔리는 사과도 사는 손님도/ 모두 똑같이 못나서 실은 못나지 않았다”라고 아퀴를 짓는 시의 화자는 작은 것에서 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졌다. 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런 걸 두고서 ‘호호학습, 천천향상’이라고들 말하는 게다.

好好學習, 天天向上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면, 날이면 날마다 (수준이) 위로 올라간다”라는 뜻이다. 하수(下手)는 그걸 모르고 고수(高手)는 그걸 알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팔자(八字)에 대해서 송재소 성균관대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중국 인문 기행 3-호남성 편>(창비, 2020년)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날마다 향상된다”로 간략히 적었다. 아울러 중국의 정치가 모택동의 모교인 ‘호남제일사범학교’를 들어서 교내에 기념으로 돌에다 새겨진 글귀 사진을 책에 소개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

“나는 정식 대학에 진학한 적이 없고 외국 유학도 한 적이 없다. 나의 지식과 나의 학문은 제일사범학교에서 기초가 마련되었다.”(같은 책, 108쪽 참조)

모택동이 해방 후 어느 회고담에서 덧붙인 말이라고 한다. 책에는 또 귀한 팔자(八字)가 보인다.

名師薰陶益友砥礪 (명사훈도익우지려)

팔자는 “이름난 스승이 덕의(德義)로 교화하고 유익한 벗들이 학문을 갈고 닦네”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향미 시인이 국어교사로 있는 부산 만덕고등학교는 중국의 호남제일사범학교가 하등 부럽지 않아만 보인다. 다행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멋진 고등학교가 어엿하게 있다니….

敎-선생은 아름다운 본을 지닌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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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젊은 여선생’, 18세기, 캔버스에 유채, 런던 내셔널갤러리.


인문사회과학 연구자 우석영 작가의 <낱말의 우주>(궁리, 2011년)엔 이런 글이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스승은 어머니와도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필요하다. 아버지가 높은 기준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면 어머니는 자식의 입장에서 자식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저 높은 곳에서 멋진 시범만 보이고 따라오기를 강요하거나 종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왜 이런 꼴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자기 자식에게) 소상히 설명해주는 자상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다. (같은 책, 503쪽 참조)

가르친다는 것. 즉 ‘교(敎)’라는 한자의 낱말 조합은 본받을 효(爻), 선생 자(子), 칠 복(攵=文)으로 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치는 글(文)로써 선생(子)이 스스로 본보기(爻)가 되어야 한다는 숨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낱말인 셈이다. 이때의 선생(子)은 성별을 막론하고, 모성(母性)을 무릇 교양의 덕목으로 갖춰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무늬만 여성이고, 여자 선생만이 있고 ‘젊은 여선생’은 좀처럼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 그렇다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 중에는 프랑스 화가 샤르댕(Chardin, Jean Baptiste Siméon, 1699~1779)이 보고 그린 <젊은 여선생>도 있게 마련이다. 그림의 두 주인공, 학생과 선생의 표정에서 우리는 긴장감과 흥미로움, 모정에서 뿜어지는 사랑의 대화가 교수법이 되어 오가는 것이 능히 짐작되고도 남음이다.

때문에 수많은 신임 여선생들이 샤르뎅의 <젊은 여선생>이란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그런다. 문제는 이것이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나중엔 ‘꼰대’가 된다는 것이다. 생각도 교수법도 나이를 좇아서 같이 낡아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낡은이가 되어서야 어디 되겠는가.

그렇다면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개인의 스펙을 늘리고자 하는 ‘학력(學歷)’에만 공들이고, 배우는 것이 가르침의 내공이 되는 ‘학력(學力)’에의 정진(精進)이 약해지는 데서 생겨나는 가치 부재의 현상일 것이다.

국어교사이자 등단 시인 조향미는 마흔의 나이 젊은 여선생 시절에 쓴 <못난 사과>’를 다시 쉰일곱의 나이(2017년 기준)에 또 응시하고 있다. 다음의 시 <사과 하느님>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과 하느님/조향미

지난여름 숨 막히는 더위

태울 듯한 햇볕을 지나온 사과다

날름거리는 벌레의 혀도 받아낸 사과다

통통거리는 빗방울 격한 바람과

사랑을 나눈 사과다

스물 몇 번 친다는 농약의 유혹을 이기고

자연이 주시는 축복과 시련을

백 프로 수용하고 견뎌낸

거뭇거뭇 울긋불긋한 뺨을 가까스로

성취한 사과 앞에서 묵상한다

둥근 손으로 예배한다

하느님의 사과

하느님인 사과


이 시는 <봄 꿈>(산지니, 2017년)의 끝에 보인다. 여기서 사과는 ‘못난 사과’의 이웃 사랑보다 훨씬 높은 내공을 성취하고 있다.

사과나무의 열매, ‘사과(沙果)’를 통해서 불우한 이웃을 보지 못한 자신을 ‘사과(謝過)’하는 자책과 화해의 모습이 ‘못난 사과’에 투영이 된 시적 화자라면, ‘하느님의 사과’는 교사 생활의 반성을 의미하는 결과를 총집합하는 ‘사과(師果)-선생님으로 살아온 결과’를 은근히 비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취한 사과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은 열매인 과일 사과를 만지는 손의 모양으로 둥글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둥근 손으로 예배”하듯이 지나쳐온 사과(師果)를 향해서 “하느님”에게 감사를 전하는 겸허한 ‘나’와 마주치고 있다. 그런 ‘나’에겐 전부였던 제자들, 그들이 “하느님인 사과”가 아니었을까.

곧 있으면 추석 명절이 온다. 나의 작은 누나는 ‘못난 사과’를 검은 비닐 한 봉지에 가득 담아 줬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에는 서울 친구가 망원시장에서 ‘홍로 사과’를 사줬다.

그래서 그랬는가. 올 추석은 열매 ‘사과’를 먹으면서 앞으로 타인에게 ‘사과’를 할 일이 적어지길 둥근 달을 보면서 나부터 기도하고 싶다.

가을 깊은데

옆방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일본의 서민문화가 꽃을 피웠던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 대표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하이쿠(俳句)가 ‘나’만 아끼지 말고, ‘너’도 연민하고 좀 보란다. 하여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우리는 참 많이 놓치고 있다. 보려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있다. 다 지가 ‘잘 난’ 덕분에 그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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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조향미 <새의 마음> (내일을여는책, 2000)

조향미 <봄 꿈> (산지니, 2017)

신경림 <시인을 찾아서> (우리교육, 2004)

정지원 <내 영혼의 그림여행> (한겨레출판, 2008)

송재소 <중국 인문 기행 3> (창비, 2020)

우석영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마쓰오 바쇼, 유옥희 옮김 <바쇼의 하이쿠> (민음사, 2020)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