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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이생진 '낮잠'과 이재관 ‘오수도(午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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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이생진 '낮잠'과 이재관 ‘오수도(午睡圖)’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오랜 낮잠은 비몽사몽(非夢似夢)을 오간다. 꿈이 아닌 듯하다가, 꿈일 것만도 같아서 꿈과 현실 구분이 쉽지가 않다. 옛 그림 속 주인공 선비는 장자를 꿈꾸는가, 아니면 나비가 됨을 꿈꾸는가. 낮잠이 길면 길어질수록 폐해는 밤이 온전히 받는다. 잠깐 자고 나면 보약 같은 것이 ‘낮잠’이지만 오래 자고 나면 낮잠은 ‘독약’이나 다름이 없다

낮잠 / 이생진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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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관 ‘오수도(午睡圖)’, 19세기, 종이에 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그림은 보는 것이고 읽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는 것이다.”

미술평론가로 유명한 이주헌의 얘기다. 문장에 ‘그림’ 대신에 ‘시’를 넣어도 뜻한 바가 같아 서로 통한다. 그래서다. 옛 사람은 ‘시화동원(詩畵同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약간의 겸연쩍음, 창피랄까!

솔직히 말하겠다. 시인 이생진(李生珍, 1929~ ) 선생의 시집이 내 서가엔 한 권도 없다. 앞의 시 ‘낮잠’은 검고 푸르슴한 오석에 새겨진 시비(詩碑)를 통해 처음 알았다. 아래의 사진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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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의 개화예술공원 내 시비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생진 시인의 '낮잠' 시비. 사진=심상훈


사진의 장소는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시비공원이다. 보령은 머드만 유명한 것이 아니고 오석과 벼루도 자랑이 되는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서해의 바다와 산들은 또 얼마나 수려한가. 바다가 보이는 산속(성주, 옥마, 봉화, 양각, 아미)의 전원주택은 낮잠 자기엔 딱 일 듯하다.

현대인은 ‘낮잠’, 옛 선인들은 ‘오수(午睡)’

낮잠은 짧을수록 건강에 좋다. 1시간 이상을 자게 되면 심장질환을 일으켜 좋지 않다고 그런다. 하지만 사랑과 기침 졸음을 스스로 속이거나 참아내기란 실로 버겁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어쩌랴. 졸리면 자야 한다. 짬짬이 숙면을 해야지 내가 살 만한 세상이 된다.

다시 직업 화가 이재관(李在寬, 1783~1838)의 <오수도(午睡圖)>를 자세히 보자. 책 베개하고 잠든 선비가 그림 중앙에 보인다. 높다랗게 책을 쌓아 등을 기대고 앉아 독서하다가 깜빡 졸음이 쏟아져서 잠든 모습이다. 선비의 왼 발이 접혀서는 오른쪽 다리 위에 척 걸쳐 있다. 창문을 활짝 젖혔다.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방은 시원하다. 덥지 않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 아니었을까.

선비를 시중드는 아이가 나온다. 소년은 부채질로 약을 달인다. 그러다가 두 마리 학이 다정히 노는 꼴을 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보낸다. 왜 그럴까. 날마다 지겹게 들었던 선비의 책 읽는 소리가 이 시간쯤이 되어야 잦아들었나 보다. 어쩐지, 평화롭다.

그런데 말이다. 그림 바깥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화가의 독창적인 센스다. 연출이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적힌 글귀(八字) 탓에 그러한 느낌이 얼핏 괸다. 착각이지만 순간 일어날 터이다. 하여튼 여덟 글자의 내용은 이렇다.

새소리가 드높다가 낮아졌다(禽聲上下) 울리니, 낮잠 자기엔 비로소 딱(午睡初足)이구나.

이 한시는 남송의 학자 나대경(羅大經, 1196~1242)의 <산정일장(山靜日長>에서 첫 줄을 취한 것이다. 미술사학자 고연희는<그림 문학에 취하다>(아트북스, 2011년)에서 말하길, “나대경의 <산정일장>은 중국과 한국에서 그림으로 거듭 그려진 문학작품이며, <산정일장>의 첫 구절에서 인용한 북송 시인 당경(唐庚)의 시구 ‘산이 고요하기가 태고시절 같고, 해가 길기가 어린 시절 같도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도 널리 인용되는 문구”라고 친절히 설명한 바 있다. 참고로 <산정일장>은 달리 ‘산거(山居)’라는 제목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산수의 즐거움(山水之樂)

현재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탁현규 박사가 쓴 <그림소담-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디자인하우스, 2014년)이란 책을 본 적이 있다. 가슴 속에 공명을 일으키는 책의 가치가 높아서 재밌고 유익했다. 내 서가에 소장할 만하다. 활자도 크고, 여백도 넉넉하다. 노안(老眼)의 고령 독자를 많이 배려한 편집이 정말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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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겸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간송미술관.


책을 통해서 화가 김희겸(金喜謙, 1710~1763)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만남이 설렜다. 흥이 올랐다. 김희겸은 산수, 초충, 인물 등에 두루 붓질이 능했다고 한다. 아무튼 책으로만 <산정일장(山靜日長圖)>라는 작품을 감상하고 봄이 좀 아쉽긴 하다. 내게 기회가 닿으면 간송미술관에서 저 그림을 직접 대면해 보고 싶다.

이 그림은 시의도(詩意圖)에 해당한다. 시의도란 ‘동양화에서 유명한 시의 내용을 가져다가 그림 그리기에 소재로 삼아 시적인 분위기 또는 시정을 맘껏 표현한 작품’을 두고서 말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전문을 먼저 알고 난 다음에 그림 세계로 입문하는 것이 바른 수순일 것이다.

문제는 한시 편역에 있다. 편역자에 따라서 똑같은 한시를 가지고도 우리말 번역이 얼마든 딴판이 될 수도 있으니, 이 점은 독자가 살펴야 한다. 아울러 직접 공부하면서 숙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시 원문을 직접 챙겨서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서는 탁현규 박사의 글을 가져다가 쓰고자 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산은 고요하니 태고와 같고,

해는 기니 짧은 한 해와 같다.

내 집은 깊은 산에 있어

매년 봄과 여름이 만날 때면,

푸른 이끼 섬돌에 차고,

떨어진 꽃잎 길에 가득하고,

문은 두드리는 소리 없고,

소나무 그림자 들쑥날쑥하니,

새 소리만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낮잠이 처음으로 흡족해,



山靜似太古 (산정사태고)

日長如少年 (일장여소년)

余家深山之中 (여가심산지중)

每春夏之交 (매춘하지교)

蒼蘚盈階 (창선영계)

落花滿徑 (낙화만경)

門無剝啄 (문무박탁)

松影參差 (송영참치)

禽聲上下 (금성상하)

午睡初足 (오수초족)



화가는 글 내용을 그림으로 충실하게 옮겼다. 언덕 위엔 장송(長松) 세 그루가 푸른빛을 뿜으며 위용을 뽐내고, 언덕 아래 널찍한 마당 한쪽엔 햇빛 가리개를 처마에 덧댄 초옥 한 채가 단아하게 자리했다. 한 칸짜리 넓은 문이 달린 방에는 선비 홀로 베개 베고 다리 꼰 채로 낮잠에 빠져 있다.

낮은 석축 위에 올린 초옥의 섬돌은 정갈하고 인적 없는 마당엔 단정학(丹頂鶴) 두 마리가 한가로이 거닌다. 띠 지붕 올린 싸리문은 닫혀 있어 찾아오는 손님이 없음을 말해준다. 문 앞에 무성하게 우거진 버드나무 덕분에 초옥이 세속과 온전히 차단된 듯하며 초옥 둘레와 마당에 심은 나무에는 붉은 꽃이 가득 피어 봄날의 절정을 맞았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책, 150~151쪽 참조)

탁현규 박사의 <산정일장도>에 대한 해박한 설명이 좋았다. 나는 글과 그림을 번갈아 보면서, 산꼭대기 정자에 자꾸 눈이 갔더랬다. 저곳까지는 걸어서 얼마나 걸리려나,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산세가 험한 편이니 족히 내 걸음엔 2시간이 걸릴 듯하다.

아침 10시에 출발하면 12시 점심, 두어 시간을 놀다가 다시 하산해 집까지 내려오면 오후 5시 가까이. 이윽고 곧 저녁이 올 것만 같다. (낮잠 자는 날은 빼고~)

어쨌든 그림 속 선비는 날이면 날마다 저곳 산꼭대기 정자까지 산책을 하긴 했을까, 하는 상상의 그 시간은 무척 즐겁다. 한마디로 재미지다.

산꼭대기 정자에 오르면 초옥과 달리, 저 건너로 아득히 강(江)이나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보일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그저 해본다. 그러다가, 정자의 이름을 중국 북송의 문인 구양수를 좇아서 ‘취옹정(醉翁亭)’이라고 달고 싶어졌다. 구양수가 쓴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언제 보아도 좋은 명문장이다.

‘취옹정기’에 이런 글이 보인다.

산수의 즐거움은 마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술을 구실 삼는 것이다. 대개 해 돋으면 숲 속의 자욱한 안개 걷히고, 저녁 구름이 돌아오면 바위동굴에 어둠이 내려, 밝음과 어둠이 번갈아 드는 것은 산간의 아침과 저녁이요.

들에는 꽃이 아름답게 피어 그윽한 향기를 내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높이 뻗어 녹음을 드리우며, 바람은 높게 일고 서리는 맑고 깨끗하고 시냇물이 말라 돌들이 드러나는 것은 산속의 사계절이다.

아침이면 나가 다녔다가 저녁이면 돌아옴에 사계절의 경치가 다르고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황견 엮음, 이장우 옮김 <고문진보 후집>, 960~961쪽 참조)

나는 점점 더 “아침이면 나가 다녔다가 저녁이면 돌아옴에 사계절의 경치가 다르고 즐거움 또한 끝이 없(朝而往, 暮而歸, 四時之景不同, 而樂亦無窮也.)” 을 것만 같은 산간에서 문득 살아보고 싶었다.

이러한 갈증 탓일까. 아는 지인의 산속 한옥(경기도 가평 북면)을 최근 자주 방문하는 편이다. 얼마 전이었다. 한옥 주인과 아는 지인과 함께 가평에서 출발, 목적지인 화악산 터널을 지나서 강원도 화천군 신녀협(神女峽)에서 가볍게 좀 노닐다가 되돌아왔을 것이다. 다음엔 이곳으로 단풍 구경을 오자고 약속하면서. 이게 다, 산거(山居)의 꿈을 내가 좇고 있어서 그런 거다.

항해의 ‘책 베게’와 추사의 ‘낮잠

조선의 화가 이재관, 그는 비슷한 또래의 추사 김정희, 항해 홍길주와 교제가 오갔다. 따라서 그들의 전문가적인 활동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하인에 눈엔 영웅이 보이지 않는다. 부처의 눈으로 보아야 상대가 부처가 되어 보인다. 그렇듯이 그들은 모두 숨길 수 없는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상대는 금세 알아챘다. 인정했다. 각자의 개성과 매력에 서로가 끌리게 되었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19세기 조선의 양반가문을 대표하는 독서광이자 장서가로 유명했다. 이재관의 <오수도>에 등장하는 책을 베고 낮잠을 자는 선비는 아마도 홍길주가 그 진정한 모델이었지 싶다.

베게는 잠잘 때 쓰는 물건이며, 꿈나라를 받쳐주는 물건이다. 오래전부터 베게는 꿈의 내용에 일종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상상이 있었다. 그래서 베고 자면 신선세계를 노닌다는 ‘유선침(遊仙枕)’의 상상이 있었고, 베고 자면 원하는 꿈에 들 수 있는 ‘여의침(如意枕)’의 상상도 있었다. 여의침에 대하여는 홍길주도 진지하게 논한 바 있다. (고연희 <그림 문학에 취하다>, 202쪽 참조)

항해와 동갑인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아예 여의침을 베고서 쓴 듯한 ‘낮잠(午睡)’이란 한시를 적은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베개 하나, 가벼워서 평안 터니 해 저물도록 시원스레 잤구나

내 눈 속에 보인 신령스러운 경지의 원광(불보살)은 아름다웠지

누가 알았으랴, 꿈과 현실이 원래 둘이 아니었음을

호랑나비 제때에 찾아드니 해는 정말 길어졌노라

一枕輕安趁晩涼 (일침경안진만량)
眼中靈境妙圓光 (안중영광묘원광)

誰知夢覺元無二 (수지몽각원무이)

胡蝶來時日正長 (호접래시일정장)

이 한시의 원제(原題)는 <부지 주지몽위호접몽 호접지몽위주여(不知 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라고 한다. 이는 고전<장자(莊子)>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야기, 요컨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는 내용을 따온 것이다.

그렇듯 오랜 낮잠은 비몽사몽(非夢似夢)을 오간다. 꿈이 아닌 듯하다가, 꿈일 것만도 같아서 꿈과 현실 구분이 쉽지가 않다. 옛 그림 속 주인공 선비는 장자를 꿈꾸는가, 아니면 나비가 됨을 꿈꾸는가. 낮잠이 길면 길어질수록 폐해는 밤이 온전히 받는다. 잠깐 자고 나면 보약 같은 것이 ‘낮잠’이지만 오래 자고 나면 낮잠은 ‘독약’이나 다름이 없다.

추측컨대, 추사는 이재관의 <오수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고나서 나름 깨치고 느낀 바 있어 시로 지은 것이지 싶다. ‘베게 하나’가 가리키는 것이 무언가. 그것은 곧 ‘책’이다. 책은 졸지에 ‘여의침’ 베게 하나로 둔갑한다. 이만한 경지이면, 왜 그가 추사인지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바다와 섬을 너무 사랑한 시인, 이생진

취하는 건 바다. 바다를 좋아해서 섬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생진 시인의 <낮잠>이란 제목을 단 시는 부제가 따로 있다. ‘술에 취한 섬’이 그것이다. 낮술 먹고서 섬이 사람인양 낮잠을 잔다는 신선한 발상과 그 놀라운 상상력이 실로 감탄스럽다. 막히는 억지가 없고 게다가 외우기 좋은 짧은 시라서 더 시인이 존경스럽다.

젊은 시인들이 좋아하고 스승으로 따른다는 유명한 시인. ‘이성복의 시 창작 수업 내용’이 담긴 우리 시대의 명저 <무한화서>(문학과지성사, 2015년)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시는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내게서 ‘피어나는’ 거예요. 손은 내 것이 아니라 연필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쓰세요.

시인 이생진 선생의 시가 대개 그러했지 싶다. ‘피운 시’가 아니라 자연히 안에서 바깥으로 ‘피어난 시’로 보이고 읽혀져서다. 앞의 옛 그림들처럼 말이다.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시의 전문을 차지하는 글자라야, 고작 열여덟(18)에 불과하다. 이게 부족하다면 부제 ‘술에 취한 섬’을 추가하더라도 스물 셋의 글자가 전부이다. 섬(무인도)과 바다의 관계를 보는 남다른 시인의 감식안! 저것이 우리로 하여금, 아연 깨달음으로 아득해지는 느낌을 주니, 나 또한 그런 낮잠을 그 바닷가에 가서 들고 싶다. 시가 참! 예쁘다. 훌륭하다!

책을 베고 잔다

나비가 찾아와도

그대로 잔다

뛰어난 문장가 항해와 추사라면, ‘물’ 대신에 ‘책’을 넣어 그리 짓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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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고연희 <그림 문학에 취하다>, 아트북스, 2011

탁현규 <그림소담-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 디자인하우스, 2014

황견 엮음, 이장우 옮김 <고문진보 후집>, 을유문화사, 2003

이은영 편역 <우리가 사랑한 대표 한시 312수>, 왼쪽주머니, 2020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2015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