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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엔터 24] 감동적 스포츠 영화가 흑인들에게 퍼뜨린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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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엔터 24] 감동적 스포츠 영화가 흑인들에게 퍼뜨린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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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주연으로 출연한 키아누 리브스가 흑인 소년들의 야구팀을 지도한다는 감동적인 얘기를 다룬 스포츠 영화 ‘하드 볼(Hard Ball)’의 포스터.

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노력과 재능’이며, 성공 여부에 ‘인종이나 출신’은 관계가 없는 것일까? 미국 라디오방송 ‘WBUR’에 의하면 그런 일은 없는 것 같다. 스포츠 세계는 시스테믹 레이시즘(제도화 된 인종 차별)과는 무관하며 흑인이 출세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대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스포츠영화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강하다.

‘블라인드 사이드’나 ‘리멤버 타이탄’ 등의 영화가 스포츠는 인종이나 출신, 계급에 관계없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 노력과 능력에 따라 누구나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메리토크라시 (meritocracy) 신화를 전파해 왔다고 방송은 지적한다. 메리토크라시는 한국어로는 능력·실력주의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황은 주로 사회적 저(소득)층에 속하는 사람이 스포츠를 통해 중층 이상의 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노력과 실력에 따라 누구나 태어난 계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헤어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는 저소득층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출세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부유층은 재산을 계속 유지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 영화에서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소셜 모빌리티(사회적 유동성)는 비현실적이다.

WBUR는 감동 스포츠 영화가 조장하는 메리토크라시를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이 고조되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미식축구선수 마이클 오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성공 스토리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난한 출신 흑인 소년이 그보다 사회적 계층이 높은 백인에 의해서 스포츠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백인 가족의 경제적 지원에 의해 성공의 길이 열리게 됐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미디어 비평가 에릭 데건스는 이 영화를 WBUR에 “대부분 백인 가족의 시각에서 그려지고 있고, 깊은 사회 문제나 그에 대한 물음에 전혀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영화에서는) 흑인 소년에게 최선의 선택지가 자기 가족이나 친구와 떨어져 백인 가족과 살게 되어 있는데, 그런 사회에서 괜찮은가?”라고 반문한다.

■ 틀에 박힌 흑인 교화 백인 히어로 등장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스포츠영화 ‘하드 볼(Hard Ball)’에서는 키아누가 맡은 도박중독으로 빚더미에 올라 있는 남자가 엉뚱하게도 시카고의 저소득자 주택에 사는 흑인 소년들의 야구팀 코치가 되는데 이를 두고 WBUR 방송의 스포츠 프로그램 진행자 올리비아 크리스천은 “주인공은 전직 야구선수가 아니라 빚투성이인 스포츠도박 중독. 말하자면 그냥 백인이 흑인 소년 앞에 나타나 그들을 승리로 이끄는 이야기일뿐”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는 흑인 소년들에게서 백인 성인 남성이 삶의 색깔을 배우는 장면도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의 스포츠 칼럼니스트 제리 브루어는 “메시지로서 ‘평등’을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하게 전해진 것은 흑인은 백인으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 스포츠사이트 더 애슬레틱의 시니어 라이터도 “백인들로부터 고무된 뒤에야 흑인 소년은 스스로 자신을 비하했다는 것을 깨닫는다”며 대체로 그런 이야기라고 조소하고 있다.

마치 백인 영웅이 나타나기 전까지 흑인들은 노력과 능력에 따라 길을 열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처럼 묘사됐다고 기독교인들도 지적한다. 노력을 하든, 능력이 있든, 결국은 인종이나 출신이 장벽이 되는 현실이나 그 장벽의 높이에 좌절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 편향된 시각으로 그려지면서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선전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 ‘메리토크라시’는 부유층의 무기일뿐

‘WBUR’는 일본에서도 ‘리멤버 타이탄’에 대해서도 ‘마이크로 어그레션(미묘한 흑인차별)’일뿐으로 ‘자각 없는 차별적 언동’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작품의 무대는 1971년 버지니아주로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된 고교 풋볼팀의 실제 흑인 코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인종이 다른 선수들끼리 으르렁거리면서도 스포츠를 통해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팀으로서도 강해지는 모습이 담겼다.

또, 처음인 흑인 코치의 취임을 환영하지 않았던 지역의 사람들도 팀이 승리를 거듭함에 따라 커뮤니티 전체가 인종의 벽을 넘어 마음을 통하게 해 간다는 얘기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미국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아미라 로즈 데이비스 교수는 “만약 팀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지역 백인들이 흑인 코치를 받아들였을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인종이 다른 지역 주민이 하나가 된 것은 사람들이 잘못을 깨닫고 레이시즘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팀이 이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마치 흑인 코치의 공적에 의해 ‘시스테믹 레이시즘’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통합된 것처럼 묘사되었고, 보는 사람들도 인종 문제가 심했던 것은 과거의 이야기로 그들은 이미 해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는 문제인데도.

BLM 운동에서도 이 뿌리 깊은 ‘시스테믹 레이시즘’에 따른 불평등을 근절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하고 있다. 런던 대학 사회학자 조 리틀러는 저서에서 불평등 위에 메리토크라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성공하든 못하든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달려 있다는 메리토크라시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부유층과 엘리트층에 의해 확산된 것으로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돼 왔다고 한다.

그리고 부유한 엘리트들은 불평등에 대한 대처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메리토크라시를 추진해 왔다고 지적한다. 그래야 빈곤을 자기 책임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경수 글로벌이코노믹 편집위원 ggs077@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