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시민활동가→ 3선 성공 최초 서울시장

실종됐다 결국 숨진 채로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은 역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자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산 증인으로 여권의 대선 주자 중 한 명이다.
박 시장은 20년이 넘게 시민사회에서 활동해온 한국 시민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의 한 농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에는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친형을 따라 상경해 경기고에 입학했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국제법을 수학한 박 시장은 한국에 돌아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으나 사형 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개월만에 사표를 낸다.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박 시장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시국사건들의 변론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사건, 말지(誌) 보도지침 사건 등의 변론을 담당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서울대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 중 하나로 활동했다.
박 시장은 1994년에는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면서 시민운동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이 단체에서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시민운동을 진화시켰다. 이 시기에 일어난 1995년 사법개혁운동, 1998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낙천·낙선운동 등 굵직한 시민운동마다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박 시장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며 시장직을 걸고 주민투표를 실시, 실패해 물러난 뒤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박 시장은 취임 이후 시민활동가·인권변호사라는 경력을 바탕으로 서울시정의 틀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세훈 전 시장의 남은 임기 2년 8개월을 넘겨받은 박 시장은 '디테일에 능하다'는 평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사안을 꼼꼼하게 챙겼다.
박 시장은 재선에 당선된 이후에도 반값등록금과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도시재생 등 자신이 꿈꿨던 수많은 사회혁신 정책을 하나 둘씩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박 시장은 2017년 19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중도포기했으나, 서울시 최초로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박 시장은 '서울 10년 혁명 완수'라는 큰 목표 아래 자신의 정체성과 같은 '시민과의 협치', '경제', '평화와 안보' 등 굵직한 정책을 내놓았다. 협치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서울시 위원회는 2011년 103개에서 2017년 7월 189개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올해 1월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하면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방역에 성공한 서울시가 '익명검사', '고위험군 선제검사' 등을 제시하며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방역의 표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박 시장이 마지막으로 직접 발표한 정책은 지난 8일 '서울판 그린뉴딜'이었다. 당시 박 시장은 "세계가 혼란스럽고 방황할 때 저희는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가면 새로운 산업화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코로나19 이후를 내다보는 대대적 친환경 정책의 밑그림을 내놨다.
하지만 다음날인 9일 오전 박 시장은 이미 공지했던 일정까지 모두 취소하고 잠적했으며, 오후에 딸의 실종 신고를 받고 북악산 일대 수색에 나선 경찰에 의해 10일 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시장은 '서울시 10년 혁명' 완성을 1년 2개월, 대선을 1년 6개월 남짓 남겨두고 서울시장 임기 3180일째인 2020년 7월 9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다.
지원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resident58@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