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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앙증맞고 깜찍한 어여쁜 유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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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앙증맞고 깜찍한 어여쁜 유홍초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무심코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석양에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맴을 도는 고추잠자리 떼가 보였다. 바야흐로 가을이 온 것이다. 봄을 느끼는 데 많은 꽃이 필요한 것이 아니듯 고추잠자리 떼만 보아도 가을을 느끼는 데엔 부족함이 없다. 바쁘게 살다 보면 계절이 오고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에 십상인데 이렇게 계절을 알아차리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게 고맙기만 하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의 연속이 도회지의 삶이지만 그래도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거나 지나치는 길가의 꽃들만 눈여겨봐도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요즘 자주 눈에 띄는 꽃 중에 유홍초가 있다. 선홍색의 작은 꽃이 초록의 넝쿨 위로 점점홍으로 피어 있는 모습은 여간 앙증맞고 어여쁜 게 아니다. 홍일점이란 중국 송나라의 왕안석이 석류꽃을 두고 읊은 만록총중 홍일점(萬綠叢中 紅一點)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그가 이 작고 깜찍한 유홍초를 진즉에 알았더라면 그 대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매꽃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덩굴식물인 유홍초는 열대 아메리카가 고향인 귀화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선 오래전부터 관상용 화초로 심어 길렀지만 이제는 따로 심어 기르지 않아도 들이나 민가 주변에 자생하며 어여쁜 꽃을 피운다. 유홍초는 잎 모양에 따라 둥근잎유홍초와 새깃유홍초로 나뉘는데 둥근잎유홍초는 둥근 심장형의 잎을 지닌 반면에 새깃 유홍초는 이름처럼 이파리가 새깃 모양을 하고 있어 쉽게 구별된다. 덩굴식물답게 주변의 풀이나 나무, 벽이나 전신주 등을 감아 오르며 덩굴줄기를 뻗어 3m 정도까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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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고 깜찍한 어여쁜 유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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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고 깜찍한 어여쁜 유홍초.

꽃은 나팔꽃과 닮은 깔때기 모양의 통꽃으로 8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10월까지 핀다. 꽃은 잎 겨드랑이에서 짧은 꽃대가 자란 끝에 2~5개가 달려 피는데 붉은색의 꽃 테두리는 5각형으로 여러 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꽃 밖으로 길게 나와 있다. 꽃의 지름은 1㎝ 안팎으로 작고 깜찍한 모양이 나팔꽃을 축소한 듯하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꽃을 피우고 나면 둥근 열매가 열리는데 나팔꽃씨와 흡사하다.

필자에겐 유홍초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앙증맞고 어여쁜 유홍초가 너무 사랑스러워 꽃을 좋아하던 어머니를 위해 어렵사리 꽃씨를 구해 고향집 화단에 심은 적이 있다.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보고 꽃이 피길 기다리며 고향집에 들를 때마다 꽃밭을 살피곤 했는데 어느 날 가 보니 유홍초가 사라져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물으니 꽃은 피지 않고 덩굴만 성해서 다른 화초를 휘감는 바람에 잡초인 줄 알고 뽑아 버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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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고 깜찍한 어여쁜 유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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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고 깜찍한 어여쁜 유홍초.

유홍초가 얼마나 예쁜 꽃인지 본 적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못내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 생명력이 강한 유홍초는 어머니의 내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해마다 어여쁜 꽃을 피우며 올해도 고향집 뜨락에서 작은 나팔을 불어대는 중이다. 유홍초 붉은 꽃을 볼 때마다 어머니와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지곤 한다.
남도의 어느 절집에서 얻어온 부채엔 ‘아침에 일어나면 꽃을 생각하세요.’란 글귀가 적혀 있다. 본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지혜의 꽃, 자비의 꽃, 청정의 꽃을 생각하란 의미이겠지만 그냥 액면 그대로 아침에 일어나 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하루는 행복할 수 있다. 꽃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기쁘게 하고 마음을 향기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수많은 꽃들이 어울려 피어 있는 것을 화엄이라 한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서로 어울려 피어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아름다움이다. 세상엔 꽃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들판의 다양한 꽃들이 어울려 필 때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나와 다른 생각, 다른 모습의 사람들과 서로 어울릴 때 세상은 비로소 아름다운 꽃밭이 되는 것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