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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리뷰] 꽃으로 풀어낸 왕조의 흥망성쇠…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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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리뷰] 꽃으로 풀어낸 왕조의 흥망성쇠…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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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6월 12일(수)부터 15일(토)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임현택 각본・음악감독, 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花史, Flower History, 2019)가 공연되었다. <화사>는 조선 선조조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임제(林悌, 1549~87)의 의인화 한문소설 「화사」를 토대로 구성된 무용극이다. 임제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라는 호를 취하고 산천을 두루 유람했으며, 풍류시인의 예혼은 오늘까지 살아남아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화사>는 고전을 화려하게 부활시키면서, 대문장가의 수사적 상상력을 재현한다. 설총의 「화왕계」의 맥을 잊는 소설 「화사」에서 임제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적응해가며 화사(華辭)와 흥망을 피워내는 꽃의 지혜를 존중하며, 당쟁에 휩싸인 자신의 왕조도 유사함을 피력한다. 그는 겨울을 이겨낸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는 하양·빨강·노랑 등의 꽃들을 관찰하여 도(陶)·하(夏)·당(唐)에 이르는 꽃나라(매화, 모란, 연꽃)를 중국 고대 국가의 흥망성쇠와 대비시킨다.

임현택(‘들숨’무용단 대표)의 각본은 기・승・전・결의 네 장(場)으로 무용극 <화사>의 큰 틀을 세우고, 프롤로그, 1막(5장), 2막(6장), 3막(2장), 에필로그(2장)로 구성된다. 중국사에 빗댄 세 왕(송설, 이태웅, 박준엽)은 도의 열왕과 영왕(매화, 봄), 하의 문왕(모란, 여름), 당의 명왕(연꽃, 가을)이다. 꽃나라의 군왕과 3대의 충신・간신・역신・은일(은거 학자) 등은 풍자적으로 묘사된다. 이야기꾼(노래 포함)으로 뮤지컬 배우인 임태경・한지상이 분위기를 돋운다.

<화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기(起): 도의 열왕(매화)은 충신과 함께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세운다. 승(承): 도를 계승한 동도의 영왕은 처음에는 정치를 잘하다가 소인배인 옥형(자두나무)을 승상으로 삼고 양귀인(버드나무)을 사랑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진다. 동도는 무장(바람)에 의해 왕이 살해되고 왕조는 망한다. 하의 문왕(모란)은 문치에 힘써 문화가 부흥했지만 어진 신하들의 충고를 안 듣고 권귀(바람)의 딸 소녀를 왕비로 취했다가 그녀에게 독살 당한다. 전(轉): 하가 망한 뒤 풍백이 실권을 잡게 되고 천하는 녹림적의 소굴이 된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나라가 태평했던 당(연못)은 명왕(연꽃)이 국방을 소홀히 하고 불교 윤회의 설법에 빠져 정사를 그르친다. 결(結): 당은 금의 왕인 풍백의 공격을 받고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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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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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작품 속에서 꽃나라의 왕 매화는 엄동설한을 뚫고 피어나는 꽃 자체의 고유한 뜻 외에도 선비로서의 임제의 모습과 황진이의 지조적 이미지가 중첩된다. 꽃 중의 왕, 모란을 통해 군왕의 처신이 강조되고, 연꽃은 깨끗하며 세상 풍파에 얽매이지 않은 군자의 덕을 강조한다. <화사>는 식물도감에 버금가는 초목의 성장과정을 왕조의 흥망 과정에 비유한다. 왕을 상징하는 매화, 모란, 연꽃 외에도 주변 인물로 계수나무・대나무・동백나무・복숭아나무・사시나무・소나무・자두나무(자두나무)・측백나무・팥배나무・회화나무・개망초・구리때백지・난초・네가래 나물・마름・반디나물・붕어마름・석잠풀・여뀌・장미・함박꽃 등이 의인화된다.

프롤로그에서 보이는 왕관이 꽃왕조를 다루는 무용극임을 암시한다. 검정옷의 장현수(검은 그림자)가 어두운 역사의 이미지를 보인다. 죽은 꽃들은 무수히 쓰러져간 역사 속의 인물들이 있었음을 표현한다. 뒤편의 무용수들 중 세 명의 왕(이태웅, 송설, 박준엽)이 천천히 나와 왕관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프롤로그가 끝날 무렵 물러나고 왕관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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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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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1막: 매화 꽃 몽우리가 이는 영상을 타고, 피아노가 라흐마니노프의 곡으로 꽃 왕조의 시작을 알린다. 해설자(임태경)가 두루마리를 펴며 왕조의 사연을 읊는다. 사연이 스쳐 지나가면 춤 무리의 움직임이 무대를 휘감는다. 궁녀 도요요(한지원), 양귀인(박수윤), 왕(이태웅)이 등장하고 나서 비발디의 음악과 함께 왕의 위기가 전개된다. 대장군 양서(윤영식), 장수 석우(김민섭), 왕 사이의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군무가 따른다. 석우가 왕을 죽이고 양서를 해한다. 군무는 석우의 행동을 따라한다. 해설자는 “석우가 왕을 죽일 때 열렬한 선비 살아서 무엇 하리오?..”을 읊조린다. 양귀인은 자살한다. 왕이 사라지고, 양귀인의 죽음에 군무도 사라진다.

장현수(국립무용단 주역무용수)의 안무는 <화사>의 커다란 한 축인 독무, 이인무, 군무로 짜인 춤으로써 분주한 조합을 구사하였고, 계절에 얽힌 꽃들의 생태를 기교적으로 세묘하였다. 그녀는 주제와 조화를 이루면서 검은 그림자 역으로 무용극을 주도한다. 그녀는 시대적 배경과 인물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해내면서 ‘들숨’ 무용단만의 창작 기법과 문화 전통을 세운 공연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창작 무용의 문화유전자를 기억시키고 있었다. 연출은 등장인물을 구별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장치로 의상의 도움을 받아 색상과 모양을 이용한다. 장현수 주축의 무용수들은 다양한 의상을 착용하고 꽃의 미적 시각화에 동참한다. 극이 진행되면서 영상은 이른 봄부터 자신을 가꾸며 다른 꽃들과 어울리고 무리를 이루다가 쇠하는 꽃들의 변화무쌍한 변화를 보이고 꽃(무용수)은 조응한다. 조안무 3인, 송 설・박수윤(국립무용단 단원)・이은솔(서율예술단 단원)의 역무(力舞)는 <화사>를 격상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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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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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2막: 목련왕 송설이 주도한다. 그의 독무로 시작은 1막과 유사하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으로 시작하여 비발디 음악으로 배합된다. 소녀(오지은)와 소녀의 아버지(정상효), 석우와 검은 그림자, 왕비(이은솔)가 등장하여 극적 구성을 이룬다. 왕과 소녀의 만남과 사랑, 검은 그림자와 석우의 감정표현, 석우와 왕의 갈등, 왕비의 외로움과 슬픔이 깔린다. 전체 군무에 천이 원용되고 현대무용이 리프팅 된다. 소녀와 아버지의 이인무에 이어 다양한 조합의 이인무가 무리를 이룬다. 왕과 소녀의 이인무에 이은 왕비의 독무는 슬픔으로 쌓여있다. 왕비를 따라다니는 노래와 피아노, 여자들은 군무에 합류한다. 군무의 진행 중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호리병으로 소녀는 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죽음을 연출한다. 왕은 고통의 춤을 추고, 소녀는 그 모습에 놀라 천으로 목을 매고 죽는다. 남자 무용수들은 한 줄로 서서 전쟁을 준비한다.

<화사>에서 음악과 의상은 극을 이끄는 중요한 축이다. 음악감독 임현택은 김현섭(관악만돌린 오케스트라 지휘자)으로 하여금 피아노 연주와 작곡, 녹음의 편집을 담당하게 한다. 라흐마니노프와 비발디의 음악은 시종・장(場)간의 극적 분위기 창출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 op.45의 제 1・2・3 악장,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 op.18의 제 1・2・3 악장, 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 op.30, 비발디의 합주 협주곡 제6번 조화의 영감 a단조 op.3이 강조되고, 협주곡 총 12곡이 고른 쓰임을 받는다. 김지원(옷짓는 ‘苑’(원) 대표)의 의상은 꽃들의 잎, 뿌리, 줄기, 암수의 수술에 따른 색깔과 형상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강경호 영상감독과 호흡을 맞춘 원재성 조명감독은 꽃의 미세한 움직임과 감정 변화에 집중하여 꽃의 의인화 작업에 감정을 이입하는 빛의 변주로 놀라운 수완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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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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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3막: 석우의 군대 신이 펼쳐진다.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면, 검은 그림자가 아박을 친다. 배우의 해설이 이어진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공간을 휘감고 검은 그림자가 등장한다. 연꽃왕(박준엽)과 왕비(한지원)의 이인무, 연꽃과 꽃(김나형)의 이인무, 이인무와 연꽃의 변주가 이루어진다. 연꽃과 이루어지는 군무는 원형이다. 원형 안에 꽃(김나형). 원형 바깥에는 검은 그림자와 이인무가 펼쳐진다. 석우를 따라하는 군무가 이어진다. 무용수 전체가 사선으로 줄을 선다. 왕의 죽음 신이 이어지고, 연꽃 춤은 계속 진행된다. 왕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다 같이 왕을 따라 죽는 신이 이어진다. 검은 그림자가 아리아를 하며 방울을 전달한다.

에필로그: 모든 무용수들이 무대 맨 앞쪽에 한 줄로 서서 검은 그림자에게 뻗은 줄방울을 들고 방울을 흔들기 시작한다. 해설자가 노래를 시작하면 무용수들은 방울소리를 멈추고 무대 뒤로 걸어간다. 해설자가 뒤에서 걸어 나오며 노래를 한다. 방울이 가운데를 지나고 나면 가운데 피트에서 프롤로그 때처럼 왕관이 올라오고 검은 그림자는 다시 왕관 앞에 뒷모습으로 앉고 3인의 왕은 왕관을 바라본다. 막이 내리면 해설자가 임재 선생의 대사를 한다. 피아노 음악이 사라지고 대사만 들리면서 극은 대단원의 막을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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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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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공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임제의 문학은 시조 ‘청초 우거진’(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을 어듸 두고 백골만 무쳣나니./ 잔잡아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으로써 기생 황진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인생무상을 한탄하며 치제(致祭)했고. 기생 한우에게 시조 ‘한우가’(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를 바치는 호방함과 인간미를 보여주었다. 임제의 일생과 일화를 살펴보는 것은 그의 인생관과 예술을 이해하는 척도가 된다.

임제는 아버지가 제주목사와 병마절도사, 훈련원 판관을 지낸 임진(臨津)이지만 스물세 살에 모친의 별세 이후 학문에 전념, 성운(成運)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사했다. 1576년(선조9년) 28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 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임지로 가던 중,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들고 황진이의 무덤에 찾아가고, 기생에게 시를 선사하는 호탕한 의기의 선비다. 임제는 스승의 형이 을사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속리산으로 은거한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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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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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임제는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스승 성운이 죽자 세상과 연을 끊고, 벼슬을 물리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술에 젖고, 기행을 일삼는 풍류객으로 일생을 보냈다. 울분과 방황으로 보낸 짧은 삶의 후반, 호협한 삶의 대가로 황진이와 같은 서른아홉에 고향 나주에서 타계했다 당대의 지성들인 이이, 허균, 양사언 등은 임재의 기행과 타고난 상상력을 발휘하는 문학적 재능을 인정했다. 〈화사>는 왕조와 그 이면의 균열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원인 묘사가 뛰어나다.

임제는 천 여수에 달하는 시(시조)를 창작한 시인이지만 왕조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삼은 한문소설 세 편을 남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화사>이다. 임제는 왕도정치를 현실과 괴리된 공허한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그의 낭만적 세계관은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다. 후손 임현택이 〈화사>의 가치를 발굴하고 무대화 작업을 실행한 것은 그 업적을 높이 살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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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 안무・연출의 '화사'

「화사」의 핵심은 ‘참된 군자는 만절 선생과 같이 화초의 미덕을 본받으려고 애쓰는 법이다. 꽃의 덕을 닦고, 꽃처럼 결백하고 어질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꽃의 성실성과 정직성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부분이다. 무용극 〈화사>는 화려한 이미지 창출에 성공했지만 방대한 내용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좀 더 단순화 시켰더라면 일반 관객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고, 모든 장르에서의 협업이 이루어낸 〈화사>의 성과와 탄생에 존중의 마음을 표한다. 〈화사>의 다른 버전을 기다린다.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