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11시, 시청 앞 광장은 따뜻했고 먼지가 없었다. 산보를 좋아하는 두 친구와 청계천을 걸었다. 광화문에서 시작해서 동묘시장 근처의 칼국수집에서 해산하는 일정이었다. 홍수를 막기 위한 측우가 이루어졌던 수표교를 지나 팔뚝만한 잉어를 바라보며 버스킹을 듣던 관수교를 거쳐 광장시장 손님들이 몰려나오는 배오게다리와 만났다. 평화시장옆 영도교를 지나면 황학동시장이 시작된다. 오십대도 청년이라는 이 시장은 동묘시장으로 연결되는데 좁은 길목은 좌판행상들과 노인네들로 붐볐다. 한겨울의 봄날이었다. 우리는 좀 더 걷기로 했다. 왕십리 바우담교를 지나 두들다리를 건너니 청계천 복원사업 때 남겨놓은 다리가 보였다. 헐린 3.1고가도로의 유물이다. 청계고가는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1967년 착공되어 71년 완공된다. 그 때 청계천변에는 긴 나무골조에 의지해 도로변에 세워진 판자집들이 서로를 의지해 다닥다닥 맞붙어 있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빨래와 대소변을 해결했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판자촌은 홍수만 나면 다 함께 휩쓸려갔다. 새마을 운동의 바람이 불자 그들은 성남과 신림동으로 이주되었다. 그 상세한 기록이 판자촌이 있던 그 곳에 체험관과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전시관에는 많은 자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2층에 마련된 휴게실은 호텔의 서가마냥 잘 정리되어 있었다. 전시관 한편에 수표교의 수표석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도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그 자리가 결정될 것이다.
문득 어제의 그 판소리가 청계천의 역사와 닮았다는 생각에 미쳤다. 김정민 명창의 판소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전통이었다는 뜻이다. 역사는 후대의 주관적 해석이다. 모두 그 시대의 현대사인 것이다. 전통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별되고 해석되고 편집되어 오늘에 이른다. 유투브에서 확인해 보라. 한국민속촌에서 줄 서서 보는 곳은 남사당패의 사물놀이터가 아니다. 커플이나 외국인을 상대로 ‘개콘’을 흉내내는 점집이다. 전통일수록 시대와의 호흡이 중요하다. 전통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판소리가 목소리와 북장단에 몸의 표현과 관객과의 교감까지 더해서 입체적인 전통 뮤지컬로 거듭나고, 청계천이 가난한 빈민의 터전이 되었다가 경제를 일구는 고가도로에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피곤에 지친 도시인의 휴식과 관광을 위한 산책로로 그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글쎄, 융합의 시대라는데 청계천 어디쯤서 김정민 명창의 판소리 한가락 듣는 날을 기대한다면 과한 것일까? 만리장성에선 패션쇼도 열린다는데.
김시래(정보경영학박사, 트렌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