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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칸보다 마음이 더 큰 '巨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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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칸보다 마음이 더 큰 '巨宅'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2)]-충북 보은 선정훈 종택 '觀善亭'

논밭 나눠주고 소작료 내려주고 세금 내 준 '爲善最樂' 실천

소작인들이 세워 준 선영홍 선생 鐵碑공덕비 나눔의 삶 상징

일제 땐 私塾 '대흥사', 6·25후엔 고시원 숱한 인재배출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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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훈종택의종부김정옥여사
[글로벌이코노믹=김영조 문화전문기자]“아유, 자그마치 집이 134칸이나 된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에 있는 ‘선정훈 종택’을 보고 하는 말들이다. 사람들은 그저 그 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 종가 사람들의 큰 가슴은 보지 못한다. 그 큰 가슴을 가늠해보려고 ‘선정훈 종가’를 찾은 것은 5월 초의 화창한 봄날이었다.

명산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오다 작은 섬을 만든 이곳에 집을 지은 선정훈 종택. 흔히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물을 피해서 짓는다 했던가? 그러나 이 ‘선정훈 종가’는 물이 돌아 흐르는 섬 위에 지어졌다. 미리 연락한 덕에 종부 김정옥 여사(61)는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기자를 맞는다. 안채 대청에는 오래된 집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형용할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느껴졌는데 활짝 열어 놓은 대청문 너머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널찍한 안뜰이 시야에 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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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넘어보이는사랑채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종가라 들었습니다.” 기자의 말에 종부는 그저 빙그레 웃더니 조용히 종가의 철학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증조부 선자 영자 홍자(선영홍) 할아버님을 기리는 철비(鐵碑)가 대문을 나서면 있습니다. 할아버님은 전라남도 고흥군에 사실 때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때 소작인들에게 논밭을 나누어주면서 농지세도 자신이 부담하는 등 선정을 베풀며 사셨습니다. 이러한 할아버님 덕에 그곳에 살던 소작인들은 배고프고 가난한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이에 소작인들이 1922년 10월에 할아버님의 고마움을 철에 새겨 기리고 있던 중 국도공사로 이 비가 헐리게 되자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와 이곳 보은으로 옮겨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안은 이렇게 증조부 때부터 나눔을 실천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종부는 나긋한 목소리로 이 집안의 내력을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설명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증조부 선영홍 선생은 전남 고흥에 살 때 대흥사라는 서숙을 설치하여 무료로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큰 정성을 쏟았다. 그리하여 당시 고흥의 유림에서는 선영홍 선생이 돌아가시자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며 매년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선정훈 선생의 무료 민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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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증조부와 함께 전남 고흥에서 이곳 보은으로 온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 선생은 99칸의 큰 집을 세우고 집 동편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좋은 본을 받는다’라는 뜻을 지닌 관선정(觀善亭)이라는 35평 서당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 저명한 학자인 홍치유(洪致裕) 선생을 모셔 인재를 양성하는데 큰 노력을 쏟았다.

이곳 관선정에서는 1926년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을 때인 1944년까지 온 나라 수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하고 공부하는 데 따르는 돈을 모두 사재로 충당하였다니 나라에서도 못할 일을 선생은 해낸 것이다.

관선정은 당시 한일강제병합으로 조선인들의 역사와 민족교육이 서서히 말살되는 가운데서도, 일제의 식민지 학교교육이 아닌 전통 유학을 교육시켜 은연중에 민족정신을 북돋우는 등 우리의 전통문화계승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곳에서 한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과거 관선정에서 공부한 이들은 1973년 관선정기적비(觀善亭紀蹟碑)를 세워 관선정과 선정훈 선생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그러나 관선정은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불타고 지금은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면학 정신은 안채에 딸린 하인들의 방을 이용해 생계를 위한 고시원으로 이어졌는데 그간 이곳을 거쳐 간 고시생이 천여 명이 넘고, 사법고시 합격자만도 50명이 넘는다니 가히 이곳은 인재배출의 성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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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일제강점기에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숙식을 포함한 민족교육에 열정을 쏟은 선정훈 선생은 교육사업 뿐만이 아니라 인술을 베풀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취재에 함께 했던 이무성 한국화가는 이 근방 사람치고 이집의 한약과 인술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위선최락’ 곧 나누는 삶을 즐거움으로

-종가의 가훈이 ‘위선최락’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위선최락’이라고 쓰인 편액을 사랑채와 안채에 걸어놓고 늘 새기면서 삽니다. 사실 착한 일을 하는 것 곧 나누는 삶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하지요. 나누는 삶을 무슨 의무감으로 여긴다면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하다보면 어려운 이웃에게도 도움이 되고 저희 자신도 힘든 줄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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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최락
가훈인 ‘위선최락(爲善最樂)’은 중국 후한의 역사서 《후한서(後漢書)》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에 서 따온 말로 이는 우리 겨레가 입춘 때 행하던 ‘적선공덕행(積積善功德行)’과도 그 뜻을 같이 하는 말이다.

“제가 결혼해 왔을 때는 고모님, 숙모님을 비롯한 식솔들이 20명이 넘게 있었습니다. 이 많은 식솔들의 음식을 장만하려면 된장, 간장을 잘 담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택에는 안채에 딸린 장독을 비롯하여 종택 안과 바깥마당에 헤아릴 수 없는 장독이 즐비했다. 지금도 1년에 10번의 제사를 모신다는 종부는 이 집에 350년 동안 대를 내려오며 만들고 있는 ‘씨간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씨간장’이란 새로 담그는 간장에 대대로 이어오던 간장을 부어 만드는 것으로 자그마치 350년간 종택의 간장 맛은 한결 같다. 이러한 장맛은 2006년 ‘간장전시회’에 출품했던 1리터짜리 씨간장이 무려 500만 원에 낙찰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때는 신세계 백화점에 기프트상품으로 0.5리터짜리 씨간장을 팔았지만 이제 씨간장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종부 김정옥 여사는 보은군수의 적극적인 독려에 ‘선씨종가’라는 이름으로 정성껏 만든 장을 팔고 있다. 현재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보존과학과를 졸업한 아들(선종완)도 이 일을 함께 하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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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
단아한 한옥의 모습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이 집에는 예부터 전해내려 오던 귀한 보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사랑채에 걸렸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편액, 어사 박문수의 편지, 이 집의 설계도면, 임창순 선생의 12폭 글씨족자 등 많은 보물을 1995년에 도둑맞았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집 주변엔 유난히 소나무가 참 많다. 거기에도 깊은 철학이 숨어있었다. 집을 지을 당시 선정훈 선생은 소작농들에게 소나무 한 그루에 쌀 두 섬씩 주면서 잘 기르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소나무가 겨레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이며, 소나무를 통해 또 하나의 나눔을 실천했음이다. 그래서 온통 집 주변은 소나무 천지였지만 안타깝게도 1980년 수해 때 소나무 300여 그루가 물에 휩쓸려 갔다고 했다.

선정훈 종가를 빛낸 선처흠의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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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홍선생철비공덕비
대문을 나서면 철비 옆에 ‘선처흠효열각(宣處欽孝烈閣)’이 있다. 이 ‘선처흠효열각’은 선정훈의 할아버님인 선처흠 선생의 효행과 그의 처 경주김씨의 지아비를 향한 정성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 고종 29년(1892)에 나라에서 세웠다.

선처흠(宣處欽?~1921) 선생은 아버지가 안질로 고생하시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침과 약으로 계속 치료받았으나 차도가 없자 매고기가 명약이라는 의원의 말에 따라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이레 동안 기도한 끝에 매를 얻어 오래된 안질이 완쾌되었다.

또 선처흠의 부인 경주김씨 역시 효성이 지극했고 남편을 하늘같이 섬겼는데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넓적다리를 베어 약으로 먹게 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목에 넘겨 병을 낫게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런 효행은 나눔의 삶과 다름이 없는 소중한 덕행이 아니던가?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흔히 이곳을 ‘선병국 가옥’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선정훈 종택’으로 바꿔 불러야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왜냐하면 이 집을 애초에 지은 분은 선영홍, 선정훈 선생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좋은 것은 ‘관선정(觀善亭)’이나 ‘선정훈 종가’로 불러야만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족교육을 담당하면서 겨레 혼을 심어준 정신을 감안한다면 이 집은 단순한 ‘아흔 아홉칸 한옥집’ 이상의 가치를 지닌 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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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각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기쁘게 실천해온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선정훈 종택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집 안팎에 줄 지어 심은 푸른 소나무의 빛깔이 이 집을 지은 선영훈-정훈 부자(父子)의 ‘나눔의 정신’이 언제나 푸르게 이어지길 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따뜻한 봄날 우리 일행은 선정훈 종가의 향기에 취해 어쩔 줄 모른다. 이집 곳곳에서 뽐내는 양지꽃, 현호색, 명자꽃은 이 집 식구들의 마음 그 자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