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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리핀을 자유 진영의 공급망으로 편입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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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리핀을 자유 진영의 공급망으로 편입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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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글로벌이코노믹 자료
필리핀이 미국의 공급망 다양화 정책의 수혜국으로 부상 중이다. 미·중 기술 경쟁의 한 축으로 광물자원 확보가 주요한 의제로 부상하는데다 필리핀이 갖는 지정학적 위치가 미국과 자유 진영 투자를 확대하는 배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도 자국 경제의 발전, 중국의 경제와 군사적 영향력에서 탈피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향후 긍정적인 신호들이 계속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현지 GMA 뉴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 상원의원 라다 태미 덕워스(Ladda Tammy Duckworth)는 9일(현지 시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 만나 미국 간호 프로그램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학생들을 필리핀의 간호학교에 보내는 아이디어를 포함해 재생에너지를 중시하려는 미국과 필리핀의 노력에 대해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덕워스 의원은 미국이 필리핀의 광물 및 전자 산업을 활용해 주요 상품의 소싱(대외 구매)을 다양화할 수 있다고 말하고, 기업과 협력해 중국 외 필리핀에서 새로운 제조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흥미로운 의제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필리핀 정부도 필리핀이 배터리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하고 필리핀의 니켈·코발트 자원을 언급했다. 필리핀도 관련 산업을 자국에서 육성하기를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필리핀의 광물자원 보유 현황 및 미국과의 협력 강화

필리핀 리소스 저널에 따르면, 필리핀은 전 세계에서 다섯째로 큰 코발트 생산국이며, 2022년에는 3800톤의 코발트를 생산했다. 또한, 전 세계에서 둘째로 큰 니켈 생산국이며, 채굴 니켈 생산량의 10%인 37만 톤을 생산했다.

필리핀 광산에서 채굴하는 니켈은 주로 라테라이트 광석이다. 라테라이트 광석은 지표면에서 생성되는 광석으로, 니켈 함량은 낮으나 매장량이 많다. 라테라이트 광석은 고압산침출(HPAL)로 정제해 니켈을 추출한다.

경제복합성관측소(OEC)에 따르면, 니켈은 필리핀에서 아홉째로 가장 많이 수출된 제품이다. 제품은 32개의 니켈 광산과 2개의 가공 시설에서 나온다. 대부분 니켈 사업장이 추가 가공 없이 니켈 라테라이트를 직접 수출한다. 직접 수출하기 때문에 직송 광석(DSO)으로 분류된다.

중국 세관총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필리핀의 대(對)중국 니켈 광석 수출은 26억7000만 달러에 달했다. 필리핀 통계청에 따르면 이는 필리핀 니켈 광석 수출의 96.5%에 해당한다. 거의 전량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의미다.

필리핀은 니켈 광산이 풍부하지만, 니켈 광석을 가공해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생산하는 능력은 부족하다. 현재 필리핀의 니켈 광산에선 대부분 저등급 니켈 라테라이트 광석을 채굴하고 있다. 이 광석은 정제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환경 오염을 유발한다. 또한, 가공 기술이 부족해 중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고 가공되면 다시 수입해 자국 산업에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에 배터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필리핀 정부도 단순 광산 수출에서 니켈 광산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2년 9월, 필리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인도태평양경제동반자회의(IPEF) 장관회의에 참석, 미국 정부와 니켈 광산 산업 협력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협약은 미국 기업이 필리핀의 니켈 광산에 투자하고, 필리핀 정부가 미국 기업의 니켈 광산 개발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필리핀 정부는 2022년 12월, 잠발레스주에 있는 에라멘광물회사(EMI) 광산 부지에서 니켈 처리 시설을 개발하는 기술 및 경제적 타당성을 평가하기 위한 연구 보조금을 수여했다. 이 연구는 EMI가 니켈 광석을 사용하여 배터리 전구체 물질로 판매하기 위한 정제된 니켈 및 코발트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조치였다.

올해 3월, 필리핀 무역 및 산업부(DTI)는 필리핀을 전기차 배터리 제조를 위한 생산 중심지로 만들려고 하며, 이를 위해 광물자원을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핀이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한 축을 담당하겠다는 뜻이었다.

특히 필리핀 정부는 궁극적으로 광물 수출이 아닌 높은 가치의 제품을 가공해 수출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에 DTI는 수출세(10%)를 부과할 것인지, 니켈의 수출 자체를 금지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정부의 산업정책 연구도 시작했다.

한편, 2023년 1월 5일 중국은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국을 국빈 방문한 자리에서 필리핀의 전기차 및 광물 처리 부문에 73억20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이는 필리핀과 미국의 협력이 강화되자 중국이 크게 긴장한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광물 수입국으로, 필리핀은 중국의 주요 광물 공급국 중 하나다.

중국은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향후 미국의 견제로 광물 수입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이런 어려움에 대비해 필리핀에 공장을 건설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다.

◇ 광물자원 개발의 문제점

필리핀의 광물자원 개발 산업은 환경적·사회적 비용이 크다. 정치 세력이 교체되면 정책 전환도 잦아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 데 매력적이지 않다.

우선 사회적 인프라 부족이다. 자본 집약적이고 소규모 니켈 채굴 작업장이 많고 흩어져 있다. 이는 사업장마다 규정과 인력, 생산력이 달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렵게 한다. 이에 서로 가까운 채굴 작업을 묶는 중앙집중식 처리 시설 수립을 논의 중이다.

에너지와 환경 문제도 심각하다. 필리핀 라테라이트 니켈 광석은 상당한 에너지가 투입되며 고압산침출(HPAL)에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다. 오염수의 처리 및 폐기가 발생한다. 전기와 물, 환경보호시설의 확보가 당장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필리핀의 불안한 정치 환경도 문제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책, 특히 광산 분야의 정책이 바뀌는 불안정한 정치 풍토를 가지고 있다.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 지역사회와 환경단체에도 사업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그간 일본이나 중국이 필리핀에 직접 투자를 하지 않고 광물을 수입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간 소홀히 했던 필리핀을 자원 공급망의 주요 후보지로 선정하고 투자 개발에 나서려는 것은 자원 확보와 필리핀의 지정학적 가치가 이를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태평양에서 셋째로 큰 섬국가다. 필리핀은 지정학적으로 태평양과 남중국해의 교차점에 있다. 이로 인해 필리핀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특히 미국은 중국이 군사력을 동원하는 방안까지 불사하며 대만을 통일하겠다고 위협하는 마당이기 때문에 이 지역 바다를 이어주는 군사적 기착점이 무척 중요한데, 필리핀이 최적의 대안이 되고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당선된 이래 미국과의 국방 협정에 따라 필리핀의 여러 지역, 남중국해를 마주한 지방을 포함해 4개의 새로운 군사기지가 위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 국방부의 태평양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섬 체인' 전략에서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 미국이 필리핀을 공급망 다원화로 흡수하려는 배경

라다 태미 덕워스는 2016년 미국 민주당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는 미국 하원의원이었다. 가장 유명한 아시아계 미국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2020년 11월 대선에서 바이든의 러닝메이트 후보 명단에도 올랐다.

그녀는 마닐라를 방문해 미국이 전기차(EV) 부품을 포함한 핵심 상품의 공급을 다변화하기 위해 필리핀의 광물 및 전자 산업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녀의 이런 제안은 그녀의 경력을 따져보거나 이전 미국과 필리핀 정부의 협상을 고려할 때 다분히 미국 정부와 민주당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9월 니켈 광산 산업 협력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이후 진전은 미국과 필리핀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필리핀은 미국의 투자를 유치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으며, 미국은 필리핀의 천연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공급망의 다변화와 안정화를 기대할 수 있어서다.

미국은 현재 중국이 크게 앞선 전 세계 자원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유 진영과 함께 그간 소홀히 했던 자원 부국을 찾아 자원 공급망으로 흡수하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필리핀을 자원 공급망으로 흡수하는 것은 필리핀이 보유한 풍부한 자원이 중국으로 흘러가 향후 미·중 기술 경쟁에서 중국이 자원을 무기화해서 미국을 압박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의제다.

한편, 이런 빠른 협력의 전개는 마르코스 주니어가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필리핀이 보인 친미 행보가 큰 힘이 되었다. 양국은 고위급은 물론 군사적 교류도 높이고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필리핀의 남중국해의 안보 취약성을 높이 평가하고, 미국이 필리핀의 군대 현대화에 대한 지지를 높이기로 한 약속을 얻어냈다.

미국은 필리핀을 자원 공급망의 일원으로, 나아가 자유 진영의 안보망으로도 활용도를 함께 고려해서 필리핀에 다가서고 있다. 미국은 필리핀과 자원 공급망 협력 과정에 필요한 국가로 한국과 일본을 언급했다. 필리핀에서 배터리와 전기차를 개발하고 생산하려면 한국과 일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투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