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와중에 AI 연구개발에 필수인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IT 산업의 지형마저 바꾸는 중이다. 그간 고성능 컴퓨팅,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슈퍼컴퓨터 등의 분야에서 주역을 차지하던 중앙처리장치(CPU)와 주기억장치(RAM)에 이어 GPU가 새로운 주인공 자리를 꿰차면서 IT 업계의 역학관계마저 바뀌는 모양새다.
◇IT 산업의 ‘자원’이 된 GPU, 달라진 엔비디아의 위상
사람에 가까운 AI를 개발하려면 이전보다도 훨씬 반복적이고 광범위하며 복잡한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컴퓨터로 실현하려면 다른 반도체 칩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이 계산하는 데 유리한 GPU가 많아야 한다.
AI뿐만이 아니다. 강력한 컴퓨팅 성능을 요구하는 슈퍼컴퓨터, 다른 기업이 필요로 하는 컴퓨팅 자원을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클라우드 그리고 이들이 모여 구성되는 데이터센터 모두 GPU가 필요하다. 즉, 오늘날 IT 업계에서 GPU는 단순한 반도체 칩이 아닌, 마치 석유처럼 취급되는 ‘자원’인 셈이다.
업계 최대의 GPU 회사 엔비디아의 위상도 바뀌었다. 기업의 IT 의존도가 높을수록, 너 나 할 것 없이 엔비디아로부터 더 많은 GPU를 얻기 위해 줄을 서는 모양새다.
대표적으로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가 있다. 테슬라의 전기차에 들어가는 자율주행 기술도 사실은 AI 기술의 연장선에 있다. 더 높은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을 완성해 제공하려면 더 많은 GPU가 필요하다.
실제로 지난 7월 19일(이하 현지 시간) 머스크는 테슬라의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엔비디아가 GPU를 공급하는 것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테슬라가 엔비디아 GPU를 많이 쓰고 있다”며 “엔비디아가 어느 정도 배려하고는 있으나, 우리가 필요한 만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대놓고 엔비디아에 더 많은 GPU 공급을 요청했다.
사실, 테슬라는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지난 2017년 자율주행차용 AI 칩의 자체 개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5년이 넘은 지금도 엔비디아에 GPU를 요구한다는 것은 자체 AI 칩이 엔비디아의 그것을 아직 대체하지 못하는 수준임을 방증한다.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함께 클라우드 시장을 양분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도 GPU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MS는 지난 6월 30일 끝난 2023 회계연도 보고서에 “데이터센터는 GPU 및 기타 구성 요소를 포함해 건설 가능한 토지, 예측 가능 에너지, 네트워킹 공급 및 서버의 가용성에 의존한다”며 “GPU 인프라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할수록 데이터센터 서비스의 운영 중단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여러 국가의 정부와 크고 작은 기업에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MS는 AI 기능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GPU 수요가 더욱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로 생성형 AI의 붐을 일으킨 오픈AI의 ‘챗GPT’도 MS의 ‘애저(Azure)’ 클라우드를 통해 서비스되는 중이다.
엔비디아가 지난 5월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272조7000억원)를 가뿐히 돌파하고, 이후에도 주식 시장과 매출 실적 등에서 승승장구 중인 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수요가 몰리는 GPU 덕분이다.
◇천하의 엔비디아를 고개 숙이게 하는 기업들
이처럼 잘나가는 엔비디아가 머리를 숙이는 기업들이 있다. 자사 GPU의 실질적인 생산을 맡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와 대한민국의 반도체 제조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그 주인공이다.
팹리스 업체인 엔비디아가 고객에게 GPU를 공급하려면 TSMC에 필요한 만큼 주문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이미 TSMC의 고급 반도체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애플이 선점하고 있어 추가 물량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TSMC가 미국과 일본, 대만에 공장을 계속 늘리는 이유도 엔비디아를 비롯해 계속 늘고 있는 고객사들의 반도체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GPU의 핵심 구성 요소인 고대역폭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 HBM)를 만드는 단둘뿐인 메모리 제조사다. 엔비디아 GPU가 제 성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반 DRAM보다 데이터를 훨씬 빠르고 많이 처리할 수 있는 HBM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최근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현상 유지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엔비디아 GPU 수요 증가에 맞춰 고부가가치 제품인 HBM의 공급도 덩달아 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MS와 구글, 아마존 등도 테슬라처럼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AI 칩을 개발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상태다. AMD와 인텔 등도 뒤늦게나마 데이터센터용 GPU를 출시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찌감치 ‘범용 GPU’로서 어느 분야에든 쉽게 접목할 수 있고, 이미 광범위한 기업 및 개발 생태계를 완성한 엔비디아의 GPU는 업계 표준으로 자리매김했고, 이를 다른 제품으로 대체하기도 쉽지 않다. 이는 앞으로도 엔비디아 GPU가 중심이 되어 재편된 현재 IT 업계의 역학 구도가 당분간 계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최용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pch@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