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지방의 요리 ‘작장면’이 인천에서 ‘짜장면’으로 변형
짬뽕은 짜장면과 더불어 가히 우리나라 대표 외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들의 소비량이 하루 오백만 그릇 이상이라고 하니 참으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이 음식들은 본래 우리나라 고유의 것이 아니고 먹기 시작한 시기도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또한 둘 다 중국인 ‘화교’와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 전통의 음식도 아닙니다. 참고로 화교란 중국 국적을 지닌 채 외국에서 살아가는 중국인을 통칭하며 우리나라에는 대략 2만 명 정도의 화교가 살고 있다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 음식들이 화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나우동은 중국인은 물론 현지 일본인의 입맛에 딱 맞았습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고 나가사키의 명물로 우뚝 섰습니다. 당연히 식당 ‘사해루’도 규모가 커져 1910년에 이르러서는 종업원 수만 3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10년대 후반에 ‘시나우동’이란 이름이 ‘잔폰’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크게 두 가지의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하나는 시나우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현지화 되면서 차츰 ‘시나’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신 ‘잔폰’을 넣어 ‘잔폰 우동’ 으로 바뀌었다는 설입니다. ‘잔폰’은 일본어로, 무엇인가 뒤섞이거나 여러 가지 일을 번갈아 한다는 뜻으로, 일본 우동에 비해 상당히 많은 재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특별히 ‘잔폰 우동’이라 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시나우동을 탄생시킨 사해루 식당에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 ‘시나’라는 말이 차츰 중국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변질되면서 이름을 바꿀 필요성이 생겼고, 그런 가운데 고향 푸젠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차폰’을 새 음식명으로 썼다고 합니다. ‘차폰’은 중국 보통어 ‘츠판(밥을 먹다)’의 푸젠 사투리로, 인사말로도 쓰이기 때문에 친근함을 강조한 측면도 있다고 전합니다. 바로 이 ‘차폰’이 후에 ‘잔폰’으로 변했다는 것이지요. 어느 주장이 더 타당한지는 각자의 판단일 것이고 어쨌든 ‘잔폰’이란 이름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짬뽕’이란 발음으로 불리게 됩니다. 잔폰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곳은 지금의 인천 차이나타운입니다.
앞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차이나타운이란 중국인 화교들이 집단을 이루며 거주하던 곳입니다. 화교들은 본국과 문물을 주고받거나 제3국의 차이나타운과도 밀접한 교류를 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잔폰처럼 국적이 불분명한 것들도 당연히 오고가게 되었으며, 그것조차도 다시 현지화 과정을 거치며 또 한 번 변화를 갖습니다. 나가사키의 ‘잔폰’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당시에는 일본에서와는 달리 그다지 인기가 없었습니다. 형태는 오늘날의 ‘굴 짬뽕’과 비슷한데, 돼지향이 진하고 많이 짠 편이어서 우리 입맛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를 눈치 챈 우리나라 화교들이 육수를 낼 때 아예 닭고기를 쓰거나 돼지냄새를 대폭 줄이고, 야채를 더 추가한 후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얼큰한 맛의 새로운 잔폰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입맛에 딱 떨어졌으며, 비로소 한국식 잔폰 ‘짬뽕’이 우리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유래입니다.
한편, 나가사키 잔폰이 인천 차이나타운에 소개될 당시 인천에도 전혀 새로운 화교음식이 서민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이름 하여 ‘짜장면’이 그것입니다. 짜장면은 중국 산동지방의 ‘작장면(炸醬麵:자장미엔)’ 요리에서 변형되었습니다. 작장면은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간단한 야식으로써 인천에 노동자로 들어온 중국인들이 즐겨 먹던 것을 우리 노동자들도 먹기 시작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작장면은 너무 짜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배를 채우는 단순 요깃감으로 인식되어 별 인기가 없었는데, 당시 식당을 운영하던 한 화교가 춘장을 묽게 하여 짠 맛을 줄이고 거기에 삶은 고기와 양파, 완두콩을 섞어서 새로운 맛의 작장면을 탄생시켰습니다. 이것을 한국식 작장면이라고 말했으며, 이때부터 ‘짜장면’이란 말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짜장면은 지금의 짜장면과 맛이나 형태가 아주 달랐습니다. 양파와 고기를 주재료로 썼던 당시 짜장면은 1945년 이 후에야 비로소 ‘우희광’이라는 화교에 의하여 오늘날의 짜장면으로 변신 하게 됩니다.
우희광은 산동사람으로 1905년 인천에 가장 큰 청요리점(공화춘)을 운영하며 잘 나갔는데, 2차 세계대전 때 경기 침체로 파산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자 겨우 숨을 돌려 가게 문을 다시 열고 값 싼 음식부터 팔기 시작했습니다. 우 사장은 당시 모두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값 싸며 양도 많고 영양도 고려한 음식이 뭐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때 마침 미국에서 캐러멜이 들어온 것에 착안하여 예전의 짜장면에 캐러멜과 고기를 좀 더 넣어 손님에게 일단 맛보게 하자 손님들은 하나 같이 극찬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기존 재료에 감자와 당근을 더 보태어 오늘날의 짜장면을 완성시킵니다. 그리고 인천역 근처에 있던 어시장을 중심으로 하여 기차로 인천 온 객지 사람들과 어시장 사람들을 상대로 짜장면을 팔았습니다. 결과는 역시 예상한 대로였고 짜장면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전국을 강타하였습니다. 이에 뒤질세라 다른 중국 식당도 앞 다퉈 우희광의 짜장면을 모방하였습니다. 물론 이 짜장면이 짬뽕의 고향인 일본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에 전해졌단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나가사키 잔폰이 한국에 와서 고춧가루 듬뿍 들어간 빨간 짬뽕으로 변신했듯이, 이 짜장면은 일본에서 어떻게 변했을까요? 일본으로 건너간 짜장면은 ‘쟈잔멘’으로 비슷하게 불렸지만 그 맛은 현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져 우리 것과 전혀 다르게 변했습니다. 최근에 한류 열풍으로 일본인들도 한국의 짜장면을 많이 찾는다 하는데, 그들이 한국의 짜장면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을 가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짬뽕의 국적은 일본 나가사키이고 짜장면은 한국 인천임이 분명하지만, 둘 다 중국 화교의 손을 거쳤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한 두 음식이 상호 교환되면서 한국식 짬뽕이 생기고, 일본식 짜장면이 탄생되었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