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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송순주(松荀酒) 단상(斷想)…혼밥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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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칼럼] 송순주(松荀酒) 단상(斷想)…혼밥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김석신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김석신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박목월의 시 『윤사월』은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으로 시작된다. 이 시를 배웠던 고교시절 사전으로는 알았지만 실제로는 몰랐던 송화 가루. 지금은 산기슭 집에 사는 덕에 송화 가루 내려앉은 방바닥을 걸레질하며 봄을 훔친다. 송화 가루를 생각하니 내가 담가드린 송순주(松荀酒)를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제대로 발효한 송순주가 아니라 소나무 순을 소주에 넣어 몇 달 우려냈을 뿐이었는데도, 혈액 순환에 좋다는 아들의 뻥에 입이 귀에 걸리셨다.

그래서 봄이면 소나무 순을 따러 다녔다. 송진이 손과 옷에 묻는 건 개의치 않았다. 나의 최선은 청정한 지역의 소나무 순을 따서 깨끗이 씻고 다듬어 말리는 것.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평생 자식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신 어머닌 내 작은 수고를 온 동네에 자랑하셨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만든 적이 없는 송순주. 그 송순주는 오로지 살아계신 어머니를 위해 존재했다. 송순주를 떠올리면 이기적인 ‘나’와 일편단심 어머니는 다시 ‘우리’가 된다.

나는 송순주를 만들어 드렸고 어머닌 송순주를 드셨다. 이처럼 음식엔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먹는 사람이 있다. 세 사람 중에 누가 가장 소중할까. 세상엔 평생 음식을 만들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음식을 팔아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어머니도 나도, 요리사도 서빙 담당도 모두 음식을 먹는 것이다. 따라서 음식을 먹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건 당연하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하고, 떡국을 먹으면서 ‘나’에서 ‘우리’가 되는 마법에 걸리기도 한다.

영화나 연극처럼 세상사에는 주연이 있다. 대학의 주연은 누굴까. 졸업장이나 학위가 누구 것인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음식과 관련된 음식인(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먹는 사람) 가운데 주연은 누굴까. 음식이 누구 뱃속에 들어가 살을 찌우는지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온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주연이면 만들거나 파는 사람은 조연이다. 주연과 조연이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영화나 연극이 살아나듯, 음식인의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밥상에 꽃이 피는 법이다. 빵 만드는 사람이 진짜 아빠처럼 만들고, 그 빵을 먹는 아이가 진짜 자식처럼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세상. 그것이 진정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일까.

요즘 ‘혼밥’이 밥상의 주연과 조연의 역할에 혼돈을 주고 있다. 혼밥은 혼자 먹는 밥 또는 혼자 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신어(新語)다. 마치 모노드라마(monodrama)나 1인극처럼, 혼밥을 하는 사람은 밥상의 주연이면서 조연이다. 식당에서 혼밥을 하면 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주인이 조연이겠지만, 집에서 혼밥을 하면 주연과 조연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혼밥은 혼자 두는 바둑 장기나, 혼자 치는 당구나 테니스 벽치기와는 다르다. 혼밥은 여럿이 먹는 시합을 하기 전에 연습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밥에는 분명히 ‘나’는 있는데 결코 ‘우리’는 없다. 이것이 혼밥의 심각한 문제점이다. ‘우리’ 없는 ‘나‘는 행복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내와 나는 조촐하고 간단하게 먹는 경향이 생겼다. 아마 자식들이 다 컸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조촐하게 먹다보니 어쩌다 반찬 수가 한두 개라도 늘면 진수성찬이 되고 행복해진다. 이런 행복한 일은 자식이 집에 오거나 쉬는 날 집에 있을 때 생긴다.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것이다. 아내는 힘들어도 기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자식들이 맛있다고 띄워주면 콧노래까지 부른다. 내 송순주가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듯, 아내의 음식이 자식들에게 기쁨을 준다. 이런 행복을 혼밥에서 찾을 수 있을까. 혼밥,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현상이다.

김석신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