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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뚝심'이 만든 현대차-포드 역전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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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뚝심'이 만든 현대차-포드 역전 드라마

1970년 11월 30일, 합작 투자 회사를 설립 계약서 전달

정주영 회장과 포니. 사진=현대차그룹이미지 확대보기
정주영 회장과 포니. 사진=현대차그룹
52년전 11월 30일. 현대자동차와 포드가 합작 회사 설립 계약서를 주고받았다. 기술 제휴로 시작된 인연이 더 커지고 단단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고 현대차의 독자 모델인 포니를 탄생하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

1970년 11월 30일은 현대차가 포드와 50:50의 합작 투자 회사 설립 계약서를 주고 받은 날이다. 당시 계약은 어느 한쪽도 완전 지배가 불가능하게 맺어졌다. 포드는 기술과 재무 상담 부분을 맡았고 그 외 나머지는 현대차가 맡았다. 또 새로운 사업 추진을 위해 필요한 추가 자금 3400만달러 장기 차관액 중 양측 주식 지분의 50%가 넘는 1700만달러는 포드의 지불 보증만으로 국내에 유치하는 획기적인 조건이었다.
합작 투자 회사를 설립하게 된 이유는 정부 정책이었다. 1969년 12월 정부는 자동차 국산화 3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해당 계획은 1970년도부터 신진의 크라운 4기통, 퍼블리카, 가솔린 버스 등 7개 차종 생산을 전면 금지해 자동차 생산 국산화율을 올리기 위해 엔진 주물 공장과 차체 프레스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당시 국내 자동차 업체는 해외 자동차 업계와 기술 제휴를 맺으면 국내에 차량을 생산해 판매하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독자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아산 정주영 회장은 그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현대, 신진, 아세아, 기아 4개 업자 가운데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 셋은 죽이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차와 포드의 협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양사는 자금문제, 재정문제, 수출문제 등으로 마찰이 있었다. 포드는 현대차에 자동차 판매 자금 능력을 선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주영 회장은 "차를 팔기 위해서는 장기 할부 판매가 필수 조건인데 현대에 과연 그 뒷받침 할 만한 자금 능력이 있느냐“며 "최소 1000만달러 이상의 자금을 포드에 줘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포드는 한국 시장을 삼키려는 의도로 합작을 한 것이지 합작의 이익을 우리와 나누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면서 "이를 기회로 현대차를 자사 부품 공장 가운데 하나로 만들 계산이었다"고 했다.

현대차와 포드의 의견 차이는 협력을 힘들게 만들었다. 또 이는 현대차가 독자개발을 만들게 하는 계기가 됐다. 계약이 틀어지자 정주영 회장은 현대그룹 초대 회장이자 셋째 동생인 정세영 회장에게 100% 국산 자동차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에는 1973년 1월 현대차와 포드의 합작 회사 설립 인가가 취소됐다.

이후 현대차는 미쓰비시자동차와 가솔린 엔진 등 제조 기술 제휴를 맺었다. 디자인은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이너의 이탈디자인이 맡았고 디젤엔진 기술은 영국의 퍼킨슨으로부터 받았다. 대한민국 최초 독자개발 모델인 '포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포니는 현대차를 세계에 이름을 알린 모델이 됐고 한국자동차 역사의 원동력과 경제 발전을 이끈 주역이 되었다. 포니는 1976년 한 해에 1만726대가 팔려 시장점유율 43.6%를 차지했다. 1984년 단일 차종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하는 큰 인기를 끌었다. 포니의 성공은 엑셀, 그랜저, 쏘나타로 이어졌으며,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지금의 현대차를 만든 시작점이 됐다.

특히 반세기가 지나며 현대차와 포드의 입장이 바뀌었다. 그 당시 현대차는 포드 모델을 생산해 판매하는 아시아의 작은 자동차 회사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2010년 포드를 앞질렀고 2021년 5월에는 17만4043대를 판매해 월간 판매 기준으로 미국 진출 35년 만에 118년 역사의 포드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코티나. 사진=현대차이미지 확대보기
코티나. 사진=현대차



김정희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h132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