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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5] ‘선박의 심장’을 독자 개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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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5] ‘선박의 심장’을 독자 개발하라

선박엔진사업 세계 1위 등극 (상)
전량 수입 의존하다 보니 납기나 가격 등 문제 발생
정주영 창업자 지시로 사업, 신한해운 발주로 생산

1979년 8월 30일 현대엔진이 개발한 국산 선박용 엔진 1호기가 신한해운이 발주한 2만5000DWT급 벌크캐리어 ‘해정(海貞)’호에 탑재되고 있다. 사진=현대중공업이미지 확대보기
1979년 8월 30일 현대엔진이 개발한 국산 선박용 엔진 1호기가 신한해운이 발주한 2만5000DWT급 벌크캐리어 ‘해정(海貞)’호에 탑재되고 있다. 사진=현대중공업
1977년 초 상무로 승진해 생산계획을 담당하고 있던 김형벽 전 회장은 정주영 창업자의 호출을 받고 6층 회장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다짜고짜 물었다.

“이봐 김 상무, 전공이 뭐지?”
김형벽 상무는 ‘내가 기계과 출신인 거 뻔히 아시면서 왜 물으실까?’ 생각하며 대답했다.

“기계공학과 나왔습니다.”

“아 그래? 기계공학과 나왔으면 기계 일을 해야지 왜 조선 일을 해?”

나무라듯이 말하는 정주영 창업자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영문도 모른채 뭐라고 대꾸를 하려는데 질문이 이어졌다.

“이봐! 선박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야?”

김형벽 상무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회장님, 엔진입니다. 사람의 심장과 같은 엔진이 제일 중요합니다.”

“맞아 엔진이야. 김 상무가 엔진 만들어.”

회장실을 나온 김형벽 상무는 김영주 사장을 찾아가 정주영 창업자의 지시를 전했다. 김영주 사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럼 엔진사업부를 만들어야지. 엔진공장도 건설해야겠네.”

1978년 9월 10일 촬영한 현대엔진 사업장 전경. 사진=현대중공업이미지 확대보기
1978년 9월 10일 촬영한 현대엔진 사업장 전경. 사진=현대중공업

선박을 움직이는 힘, 엔진사업에 도전하다


현대중공업은 선박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제품이자, 선박 가격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엔진을 1970년대 후반까지도 전량 수입해왔다. 스위스의 슐쩌(Sulzer)나 일본 메이커의 제품을 수입해 탑재했다. 이것은 선주들의 요구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량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납기나 가격 등과 관련해 자주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정주영 창업자는 엔진사업 진출과 엔진공장 건설을 지시했다.

“선박의 심장인 엔진의 국산화 없이 조선산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엔진을 만들어야 한다.”

선박의 심장, 기계공업의 꽃이라 불리는 엔진은 주조와 단조 등 대형 소재 생산과 초대형 정밀기계 가공, 시운전 설비가 요구되는 종합기계산업이었다. 대형기계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1978년 당시 현대중공업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정주영 창업자의 혜안으로 엔진공장 건설의 시동을 걸었다.

선박 추진용 대형엔진을 생산하겠다는 현대중공업의 계획에 대해 유럽 및 일본의 엔진 메이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현대중공업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현대중공업은 태생부터 불가능하다는 주변의 평가와 우려에도 굴하지 않고 불굴의 현대정신으로 도전하면서 성장해왔다.

현대중공업은 1976년 7월 엔진사업부를 발족하고, 1978년 8월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엔진공장을 완공했다. 이에 앞서 선박용 대형 디젤엔진 제작 기술을 도입했다.

1975년 6월 스위스의 슐쩌, 1976년 9월 덴마크의 B&W(Babcok & Wico), 12월에는 독일의 MAN(Maschinenfabrik Augsburg-Nurnberg)과 기술제휴를 맺었다. 이를 통해 대형 2행정엔진 및 중속 4행정엔진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세계적인 엔진 메이커 3곳과 기술제휴를 맺은 것은 선주들의 요구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주가 슐쩌 엔진을 선택할 수도 있고, MAN 엔진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B&W 엔진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초기에는 슐쩌 엔진이 가장 많이 선택됐습니다.”(김대두 전 현대중공업 전무)

현대중공업은 1978년 11월 엔진사업부를 현대엔진공업(이하 현대엔진)으로 독립시켰다. 초대 사장은 현대중공업 김영주 사장이 선임됐다. 그 만큼 정주영 창업자가 엔진사업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했다. ‘기계박사’로 불리던 매제 김영주를 엔진사업의 적임자로 보고 사장을 맡겼던 것이다. 정주영 창업자로부터 엔진사업 추진을 지시받았던, 그리고 공장 건설을 주도했던 김형벽 상무도 현대엔진으로 자리를 옮겨 사업의 정착에 힘을 보탰다.

엔진공장을 건설하는 사이 제휴선에 인력을 보내 기술을 연마시켰다.

공장을 완공하고 인력을 양성해 생산체계를 갖췄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선박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엔진을 사줘야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엔진의 구매 대상자는 현대중공업에 선박을 발주한 선주들이었다. 선주들은 자신의 배에 장착할 엔진을 지정했다. 그런데 선주들이 엔진 메이커로는 전혀 이름도 없는 현대중공업을 지명할 리 만무했다. 일본과 유럽 엔진 메이커의 라이선스 생산이라 해도 현대중공업의 자체 생산기술력을 믿지 못했다.

다행히 국내 선사인 신한해운으로부터 엔진을 수주했다. 창립 초 VLCC(초대형원유운반선) 2척을 주문했던 리바노스 이상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현대엔진은 선박용 국산엔진 1호기 제작에 돌입했다. 조립 공정상 중요한 부분에서 작업자의 숙련도가 낮았기 때문에 2교대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엔진을 시운전하는데 볼트가 빠져 실무자들이 엔진 전체를 분해하기도 했다. 다행히 볼트는 찾았지만 6개월여 정도 걸려 엔진을 다시 조립해야만 했다.

1979년 5월 9380마력의 ‘현대 B&W7L55GF’형인 선박용 국산엔진 1호기 제작에 성공, 신한해운이 발주한 2만 5000DWT(재화중량톤수)급 벌크캐리어 ‘해정(海貞)’호에 탑재했다.

이후 1981년 자체 제작한 1만 5000마력의 엔진을 외국 선주인 리바노스 선박에 처음 탑재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엔진 수출길에 나섰다. 동시에 현대중공업은 물론 삼성중공업·대우중공업·대한조선공사 등에서 건조하는 선박에 엔진을 납품하며 국내 조선소 대상 엔진 판매에서도 호조를 보였다.

이에 힘입어 1979년 2대의 엔진을 제작한 지 4년 만인 1983년 82대(120만 마력)의 선박엔진을 생산하며 엔진 100대, 100만 마력을 돌파했다. 일본의 엔진 생산업체가 달성하는데 15년 걸렸던 기록을 무려 10년이나 앞당긴 것. 그 과정에서 1983년 1억 달러 수출로 ‘1억불 수출탑’을 수상하고 1984년에는 한국생산성본부로부터 제1회 생산성대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철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자료: 현대중공업>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