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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4] 정주영 창업자 ‘해운업 진출’ 발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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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4] 정주영 창업자 ‘해운업 진출’ 발판 마련

발상의 전환, 인수 포기 선박으로 한국 해운업 성장 이끌다 (하)
주인잃은 세 척으로 설립한 아세아 상선
현대상선 거쳐 국적선사 HMM으로 도약중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안벽에서 최초 건조한 1호선(앞줄)과 2호선의 명명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현대중공업그룹이미지 확대보기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안벽에서 최초 건조한 1호선(앞줄)과 2호선의 명명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현대중공업그룹

선주가 포기한 VLCC 2척을 계속 건조하라


처음으로 겪은 선주의 횡포에 현대중공업은 국제재판소 소송으로 대응했다.

세계 해운업계에 리바노스가 현대중공업에 빚이 있음을 알리고 다른 선주들도 이런 횡포를 부리지 말라는 경고 차원이었다. 설사 패소해도 큰 손해가 없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2000만 달러를 지불한다 하더라도 비슷한 배를 1척 만들려면 4000만 달러가 들기 때문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통 큰 결단으로 소송은 마무리됐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계약금을 돌려주는 대신 리바노스로부터 새로 배 한 척을 발주받고, 갈곳 없는 애틀랜틱 배러니스는 현대중공업이 인수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소송을 취하했다.

리바노스의 인수 거부 직후, 홍콩의 CY퉁까지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해 왔다. 25만 8300DWT(재화중량톤수)급 VLCC 7308호와 7310호 2척이었다. 그나마 CY퉁은 선가의 30%인 계약금 2799만4000달러를 깨끗이 포기하고 선주 감독관을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발주 취소와 인수 거부로 자금 순환이 힘들어지고 경영 위기는 숨통을 조이듯 심각해졌다. 임원들은 건조 중인 7308호와 7310호의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나 정주영 창업자는 재고의 여지도 없이 작업 강행을 지시했다.

"나는 하던 일을 도중에 중단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 어려웠던 상황 속에서 아우와 매제의 집까지 팔아 넣으며 고령교 공사도 끝을 냈는데, 배 2척의 건조 중단은 고려할 거리도 안 된다."

정주영 창업자는 자신의 성격을 운운했으나 실상 모든 계산을 끝마친 후의 확신이었다. 건조 작업을 중단하면 그동안 투입한 자금은 고스란히 손실이 되지만, 일단 배를 만들어 놓으면 훗날 팔거나 분명 다른 용도로 잘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석유파동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는 도중에 저렴한 원가로 배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득이기도 했다.

선박 수주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마저 중단하면 당장 조선소 가동률이 떨어져 감원(減員) 조치가 불가피했다. 어떻게 만든 현대조선인가? 구두끈도 못 풀고 자면서 다 같이 한 덩어리로 뭉쳐 수고와 노력으로 만든 대역사인데, 그 일터를 잃는 사람이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정주영 창업자의 속 깊은 결단으로 어수선했던 현대중공업의 분위기는 이내 진정됐다.

그러나 선주들의 경우 없는 횡포는 계속됐다. 1978년 12월 제2차 석유 파동이 불어닥쳤을 때에도 발주 취소의 덫에 걸릴 뻔했다. 일본 ‘재팬라인’에서 수주한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4척과 홍콩 ‘월드와이드쉽핑’에서 수주한 VLCC 2척 등 6척이 표적이었다.

월드와이드쉽핑에서 발주한 2척은 재팬라인에 용선(傭船)을 주기로 약속된 탱커였다. 따라서 현대중공업에서 건조 중인 6척의 VLCC에 대한 기술감리를 재팬라인이 도맡았다.

제2차 석유파동으로 유조선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자 선주사 재팬라인은 계약을 취소하고 돈을 챙기려고 계략을 꾸몄다. 현대중공업 실무담당자를 일본으로 불러 선박 건조가계약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자인(自認)받아 어떻게든 계약 취소로 유도할 심산이었다. 당시 담당자들은 일본에 붙잡혀 선주로부터 심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마침 월드와이드쉽핑 대표가 “배를 안 빌려 가면 고소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재팬라인의 계약 취소 공작은 중단됐다. 다행히 VLCC 6척은 계획대로 인도했다.

VLCC 6척의 선가는 무려 2억 5000여만달러였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 실정으로는 나라가 흔들릴 만큼 큰 액수였다.

골칫거리 VLCC 3척,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자산으로 변신


7302호·7308호·7310호…. 울산 앞바다에는 말끔한 자태의 VLCC 3척이 일없이 놀고 있었다. 언제쯤 힘차게 닻을 올려 울산 앞바다에서 첫 출항을 하게 될는지…. 미(未)인도선 3척의 처리 문제로 그룹 전체가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주영 창업자는 이미 생각이 있었다. ‘Made in KOREA.’ 잘 만들어진 신상 26만t급 VLCC 3척은 해운업을 시작할 수 있는 든든한 자산이었다.

정주영 창업자의 발상의 전환은 이미 여러 차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500원권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으로 차관 도입의 기회를 잡았고, 백사장 사진과 유조선 설계도 한 장으로 2척의 VLCC를 수주하지 않았던가.

정주영 창업자는 과연 언제부터 해운회사 설립 구상을 구체화했을까? 아마도 리바노스가 인도납기일이 하루 초과됐다고 우기며 7302호를 인도거부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부터가 아닐까. 창업자는 즉각 지시했다.

“리바노스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한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7302호를 국적선으로 취항시킬 계획을 검토하라.”

어쩌면 정주영 창업자는 현대중공업 설립을 준비하며 ‘먼 훗날 때가 되면 해운회사도 운영하리라’는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단지 그때가 앞당겨진 것일 뿐인지도 몰랐다. 평소 창업자는 입버릇처럼 “위기는 기회다. 단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밀물처럼 밀려오는 위기들을 이미 기회로 포착하고 있었던 건 아닐지. 이렇게 미인도(未引渡) VLCC 3척은 정주영 창업자의 큰 그림 속으로 들어와 ‘아세아상선’ 탄생을 이끌었다.

아세아상선은 1976년 3월 25일 현대중공업 기획실 한쪽 해운과에 간판을 내걸고 업무를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유공과 장기 용선 계약을 맺으며 원유 수송의 국적선 시대를 활짝 열었다.

7302호는 애틀랜틱 배러니스에서 코리아 선으로, 7308호는 코리아 스타, 그리고 7310호는 코리아 배너로 불렀다.

마침내 아세아상선 선원들이 승선한 국적선이 우리나라에서 사용할 원유를 실어 나르는 첫 항해에 나섰다. 1976년 9월 3일 코리아 선이 태극기를 펄럭이며 걸프만으로 출항했다. 이어 코리아 스타, 코리아 배너도 2개월 간격으로 출항했다.

정주영 창업자가 발상의 전환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아세아상선은 이후 현대상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우리나라 대표 해운사로 성장했다. 지금은 HMM으로 다시 이름을 바꿔 5대양을 누비고 있다.

<자료: 현대중공업>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