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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4] 해운시장 불황 닥치자 선박 버리는 선주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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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重 50년-4] 해운시장 불황 닥치자 선박 버리는 선주 속출

발상의 전환, 인수 포기 선박으로 한국 해운업 성장 이끌다 (상)
1974년 1호선 인도후 찾아온 대공황
리바노스 갖가지 트집 잡으며 갑질

1973년 12월 4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1호선(앞줄)과 2호선이 건조되고 있다. 사진=현대중공업그룹이미지 확대보기
1973년 12월 4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1호선(앞줄)과 2호선이 건조되고 있다. 사진=현대중공업그룹
1976년 7월 30일, ‘코리아 선’호가 울산항을 떠났다. 쿠웨이트를 향해 시험운항 길에 오른 것이었다. 까다로운 말라카 해협도 무사히 지나 순조롭게 쿠웨이트 항구에 접안했다. 우리나라 정유공장에 필요한 원유를 수송하러 간 초대형원유운반선(VLCC)이었다. 항구로 배를 접안시키기 위해 갑판으로 올라온 현지 도선사들은 사뭇 신기한 표정으로 배를 살피며 이승우 선장에게 물었다.

“처녀항해 같은데… 어디서 만든 배냐?”

“코리아, 우리가 만들었다.”

“그럼 선원도 한국인이란 말이냐?”

“얼굴 보면 모르나, 모두 내가 훈련시킨 선원들이다.”

“행선지는 어딘데?”

“코리아, 울산이다.”

도선사들은 정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국에서는 맨날 중고선만 왔는데 26만 t짜리 새 유조선을 자기들이 직접 운항해 왔다니 그들이 의아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랬다. 태극기를 단 ‘코리아 선’의 원래 이름은 ‘애틀랜틱 배러니스’였다. 1974년 6월 28일 명명식을 가진 현대중공업이 처음 수주해 건조한 2척의 VLCC 중의 한 척이었다.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가 주문했던 이 배가 왜 이름을 바꾸고 한국으로 원유를 싣고 가기 위해 쿠웨이트에 입항했단 말인가?

“코리아 선 쿠웨이트 무사 도착”이라는 이승우 선장의 전문(電文)을 받은 정주영 현대그웁 창업자는 ‘코리아 스타’와 ‘코리아 배너’도 출항을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코리아 스타’와 ‘코리아 배너’ 역시 ‘애틀랜틱 배러니스’와 같은 기구한 사연을 지닌 배들이었다.

세 척 모두 선주들이 인도를 포기해 바다 위에 마냥 떠 있다가 국적선 원유수송선으로 새 생명을 얻은 배들이었다.

리바노스, 인도일자 하루 넘겼다고 트집


1973년 10월 벌어진 제4차 중동전으로 중동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가 촉발됐다. 유가가 4배나 폭등하면서 세계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에 빠져들었다.

연이어 원당(原糖)·주석·보크사이트·아연·면화·밀·구리·커피 등의 생산국가도 앞다퉈 자원 무기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등 중남미 일부 국가에서는 수출 가격의 100% 인상을 관철하기 위해 바나나를 바다에 쏟아버리는 시위까지 벌였다.

세계 경제의 급속한 침체는 국가 간 교역물량을 격감시켜 세계 해운업계에 일대 불황을 몰고 왔다. 여파는 곧바로 조선업계에 밀어닥쳤다. 1974년에 들어서면서 선복량(船復量) 과잉이라는 난관에 부딪쳤다. 그중에서도 세계 전체 선복량의 40%를 차지하던 유조선의 과잉이 두드러졌다.

조선업계 불황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 우선 VLCC 발주가 줄었다. 아니 뚝 끊어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 다음으로는 VLCC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게 되자 건조를 마친 선박의 인도를 취소하거나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업계에 불황이 오면 으레 따라온다는 선주들의 횡포가 시작된 것이었다.

현대중공업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1호선인 애틀랜틱 배런은 1974년 12월 선주인 리바노스에게 인도됐으나, 이어 인도를 앞두고 있던 2호선인 애틀랜틱 배러니스의 운명은 엇갈렸다.

애틀랜틱 배러니스는 이미 1974년 6월 명명식을 치렀으며, 11월 완공 일정으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계약상 인도기일인 1974년 12월 31일을 충분히 맞출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리바노스는 사소한 것까지 트집을 잡으며 계속 까다로운 요구를 했다.

그때마다 조선소 현장은 밤새워 돌관작업을 하는 등 그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는 사이 계약상 인도기일을 넘겼고 6개월의 유예기간을 포함한 1975년 6월 30일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겨우 끝났다 싶었는데 리바노스는 또 다른 개조를 요구했다. 인도 만기일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정주영 창업자가 직접 나섰다.

“이번이 마지막이냐?”

“그렇다.”

리바노스 측에 최종 확인을 받은 다음 작업을 강행, 가까스로 제 날짜에 작업을 마쳤다.

“진짜 끝이다!”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만세 삼창을 외쳤다. 그런데 리바노스 측에서 돌아온 반응은 실로 기가 막혔다.

“인도일자가 하루 초과됐다. 인수를 거부한다.”

현대중공업은 유예기간 6개월을 1975년 1월 1일~6월 30일(181일)로 계산했으나, 자신들은 1개월을 30일로 계산해 6개월은 180일이어서 1975년 6월 29일이라는 주장이었다.

리바노스는 애당초 애틀랜틱 배러니스를 인도받을 생각이 없었다. 1971년 계약 당시 “건조선박에 대한 선주 측의 어떤 조건 제시에도 응한다”는 조항을 무기 삼아 의도적으로 공기를 지연시켰다. 노련한 선주 리바노스는 이 조항을 미리 계산해 둔 것이었다.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선박 대신 원리금을 받아내려는 속셈이었다.

<자료: 현대중공업>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