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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장미의 땅에 새겨진 남북한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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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장미의 땅에 새겨진 남북한의 발자취

이호식 주불가리아 대사

장미와 요구르트의 나라 불가리아는 1948.11월 북한과 수교를 맺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동유럽 공산 체제의 붕괴와 한국의 88 올림픽 및 북방정책으로 1990.3월 한국과 손을 잡는다. 한국과 수교 후 30여년이 지난 지금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한 한국은 국제사회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소피아 방문 장면을 기억하는 불가리아인이 많고, 개점 휴업 상태이기는 하지만 평양에 불가리아 대사관이 남아있으며, 소피아에는 대규모 북한 대사관이 운영되고 있다. 남북한 모두와 인연을 갖고 있는 불가리아에서 남북한이 걸어온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성찰하고 보다나은 미래를 그리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6.25로 시작된 북한과 불가리아의 혈맹관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불가리아는 북한에 많은 의료물자 지원과 함께 의료진을 파견한다. 1952.3월 50명, 1954.4월 47명, 1957.5월 소인수 등 총 3차례 의료진이 파견되었으며, 폭격으로 불가리아 의사가 사망하기도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의 전쟁고아도 받아들여 일정기간 돌보았는데, 1952년 200명, 1953년 300명이 불가리아에 들어왔고 이들은 1956-58년 대부분 북한으로 돌아갔다.

1953-54년간 북한 유학생 200여명이 불가리아대학에 들어와 공학과 경제학을 공부한다. 북한 유학생 출신 아버지와 불가리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카맨 남 소피아대 교수의 이야기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1956.6월 김일성은 불가리아를 방문하여 북한과 불가리아간 혈맹관계를 확인한다.

북한 유학생 4인방의 망명이 던진 파열음과 밀월 시기


1956년 헝가리 자유화 운동과 소련의 무력 진압의 여파는 불가리아에도 불어왔고 북.불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유주의 물결이 동유럽에 확산되면서 1962년 최동성, 이상종 등 북한 유학생 4명이 북한의 귀국 명령을 거부하고 불가리아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 불가리아 주재 북한대사관은 이들을 체포 감금 고문하였고, 자국 땅에서 벌어진 외교적 폭거에 불가리아 정부는 분노한다. 유학생 2명은 감금 1개월만에 북한대사관을 탈출하였고, 북한대사관이 나머지 2명을 강제 북송하려했으나 소피아 공항에서 불가리아 당국의 저지를 받는다. 이 사건으로 불가리아정부는 1962년 9월5일 북한 대사를 추방(PNG) 조치하였고, 다음날 북한도 주북한 불가리아대사를 추방하는 보복조치를 취한다.

북한의 지속적인 송환요구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당국은 이들 4명이 지방에서 직장을 갖고 생활하게 배려했지만, 북한을 의식하여 불가리아 국적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이들 중 3명은 불가리아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한국과 불가리아 수교 이후에는 한국 교민사회가 불가리아에 뿌리내리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여 지금도 많은 교민들로부터 존경 받고 있다.


북한 유학생 망명 사건으로 악화되었던 북.불 관계는 1960년대 후반 개선된다. 마오쩌뚱의 급진적인 문화혁명에 대한 거부감으로 소련과 북한의 이해가 일치했고, 소련의 브레진스키는 동유럽 국가에게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종용한 것이다. 북.불 관계는 1968년부터 점차 개선되어 1980년대 중반까지 밀월관계가 지속된다. 이 기간 중 양국의 지도자 토도르 지프코프와 김일성은 1976년과 1984년 및 1985년 각각 두 차례 상호 방문하며 유대를 과시한다.


양국 지도자 간 상호 방문 교류(왼쪽부터 '김일성, '토도르 지프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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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불가리아 소피아대학교 한국학과


한국으로 옮겨간 중심 추


북.불 밀월관계의 전제에는 불가리아의 한국 불인정 원칙이 있었다. 이 원칙은 1980년대 들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1980년 불가리아의 해운회사가 한국 현대와 계약을 모색했고, 한국인들이 불가리아 입국비자를 신청하기도 한다. 1981년 불가리아산업무역협회(BTPP)와 한국의 KOTRA가 초보적인 협약을 맺었고, KOTRA 주선으로 불가리아 경제인 3인이 한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이러한 한국과의 상업, 산업, 학술, 문화, 스포츠, 비정부기구간 교류시도는 북한을 의식한 불가리아 정부에 의해 좌절된다.

한국과 경제.인적교류 움직임은 1980년대 후반 본격화되었고, 88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경제발전 실상을 불가리아 등 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북한과의 경제관계가 위축되고 정부 간 경제협력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불가리아는 건실한 한국기업에 눈을 돌렸다. 1987.12월 부다페스트, 1988.3월 바르샤바에 KOTRA 사무소가 개소되는 가운데, 1988.9월 BTPP 회장이 공식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방한하였고, 다음 달 이선기 KOTRA 사장이 방불한다. 소피아 KOTRA 사무소가 1989.4월 개소하였고, 1990.3월 마침내 한.불 국교가 수립되면서 50여개 한국 기업과 은행이 참여하는 한.불 무역산업위원회가 설립된다.

KOTRA를 척후병으로, 경제라는 실탄과 북방정책이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이 성공적으로 동유럽에 상륙한 것이다. 바르샤바조약 와해로 인한 불가리아의 정변, 북한과 동유럽국가의 경제의 침체, 양국 공산지도자의 사망이라는 정세변화가 순풍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소피아에서 찾아보는 남북한 협력의 씨앗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이후 불가리아는 2004년 NATO, 2007년 EU 가입 등 발 빠르게 서유럽 편입의 길을 걸었고, 북한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반면 한국은 경이로운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K-Pop, 태권도, 한국어, 한국 영화와 드라마 등 문화콘텐츠에 대한 공감까지 얻으면서 불가리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북한은 한국의 약진에 반발하며 초조함을 보여 왔지만, 한반도에서 불어온 남북관계의 훈풍은 소피아에도 전해졌다. 2018년 한국대사 관저에서 개최된 불가리아 대통령 초청 아시아 대사 모임에 북한 대사가 참석할 정도였다. 그러나, 남북관계 정체는 소피아의 남북 접촉에도 악영향을 미쳤고, 코로나 사태 이후 소피아의 북한 대사관은 방역을 이유로 칩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이 공존하는 불가리아에서 남북한 협력의 씨앗을 찾아보는 것은 의미 있을 듯하다. 한국의 동유럽 진출에서 경제와 인적교류가 척후병이 되었듯이, 불가리아 내 한국마트에 북한산 인삼, 대동강 맥주를 진열대에 올리는 작은 시도가 북한이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나서도록 독려하는 밀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가리아에도 남북 분단의 시기가 있었다. 1876년 오스만 제국의 500년 지배에서 독립할 당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7년 만에 세르비아와 전쟁을 치르면서 자력으로 통일을 달성했다. 그래서, 불가리아 달력에는 9.6. Unification Day가 붉게 적혀 있다. 유럽의 동쪽 끝 불가리아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 통일 한국의 달력에 통일기념일이 새겨질 방안을 상념해 본다. 끝.



※ 김소영 소피아대 한국학과 교수의 「불가리아 북한 유학생의 인생 여정」, 「Korea in the Bulgarian Archives, 1945~95」 논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