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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계 수재, 의학계열에만 몰리는 건 개인·사회에 심각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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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계 수재, 의학계열에만 몰리는 건 개인·사회에 심각한 우려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47)] 안전으로 퇴행하는 사회

이공계 수재들이 의대에 몰리고 있다. 의료행위를 자기실현의 장으로 생각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단지 고수입을 올리기 위해 지원하는 것이라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이공계 수재들이 의대에 몰리고 있다. 의료행위를 자기실현의 장으로 생각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단지 고수입을 올리기 위해 지원하는 것이라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지난 9월 17일 2023학년도 전국 대학 수시모집이 마감되면서 본격적인 입시철이 시작됐다. 자연계열 최고 경쟁률 학과는 예상대로 의예과였다. 한 수도권 대학교 의예과는 논술전형으로 9명을 모집하는데 5835명이 지원해서 648.3 대 1이라는 기록적인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외의 대학에서도 올해 의대‧치대‧한의대‧수의대‧약대 수시모집의 평균경쟁률은 33.1 대 1이었고, 상위 10개 대학 학과 경쟁률은 모두 수백 대 1에 달했다.

이과계 수재들이 의대에 지원하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물론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과계 수재들은 의학계열에 지원하고, 문과계 수재들은 법학계열에 지원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다. 미국의 주류 지배계급을 칭하는 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 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도)도 중고등학교부터 명문 사립기숙학교를 나와 소위 아이비리그 대학(Ivy League 대학: 미국 북동부에 있는 8개의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의대나 법대를 졸업하는 것을 성공한 인생의 전형으로 삼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과 그 전신인 중앙고용정보원의 발표를 보면 이과계 수재들이 의학계열에 몰리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앙고용정보원이 2005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월평균 수입이 높은 직업 중 의사는 7위에 그쳤다. 하지만 고용정보원이 올해 4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개 직업 중 기업 고위 임원(8위)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의사가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상위권 수험생 중 의대 공부가 정말 적성에 맞지 않는 한, 웬만해서는 일단 의대부터 지원한다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더구나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면서 오랫동안 현직에서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의학 계통 직업의 매력은 상승할 수밖에 없다.

유능한 인재들이 의대를 포함한 의학계열에 많이 지원한다는 것 자체는 염려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수한 인재들이 의료인이 된다는 것은 국민 건강을 위해서도 적극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과계 수재들이 의학계열에 몰리는 실질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그렇게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의료사업에 적성이 맞고 의료행위를 통해 자기실현을 하는 의료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특히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행위를 한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Abert Schweitzer)나, 둘째 아들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평생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부산 지역에서 의료활동과 사회사업을 한 장기려 박사와 같은 훌륭한 의료인들이 많이 배출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단지 직업의 안정성과 고수입만을 목적으로 이과계열의 수재들이 의대에 대폭 지원한다는 것은 개인을 위해 또 사회를 위해 심각한 우려를 낳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허용된 여러 가능성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하는 책임 있는 존재이다. 가능한 한 자기 잠재력을 많이 인식하고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개인이 갖는 책임이다. 자기 잠재력을 실현함으로써만 인간은 참되고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음악가는 음악을 작곡하고, 미술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자기실현이 반드시 예술적인 면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부모, 교사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특정 직업을 통해서만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수한 인재 의료인은 국민건강 위해 적극 권장
장기려 박사와 같은 훌륭한 의료인 배출 가능성
자기 잠재력 실현으로 인간은 '진실한 삶' 살아

하지만 자기실현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다. 사실 매슬로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훌륭한 면, 재능, 창조성 등을 두려워하는 모순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자기실현은 충족감을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책임감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실현의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생존, 안전, 소속, 인정 등의 하위 욕구들이 어느 정도 만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실현을 못 하는 제일 큰 이유는 안전의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실수하고 타성에 빠진 습관에서 벗어나겠다는 지속적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걱정을 증가시키는 것에서 도피하여 안전과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특히 불안전한 환경에 처하면 안전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 하나 개인의 자기실현을 어렵게 하는 원인은 사회적 영향이다.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실수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안전한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 사회가 안정적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가장 무기력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가족 환경이 중요하다.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시행착오를 하며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지지적(支持的) 환경이 필요하다. 현재 의사뿐만 아니라 공무원, 교사 등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그만큼 현재 우리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인간의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즉 ‘결손(缺損)동기’와 '성장(成長)동기'이다. 결손동기는 매슬로의 유명한 ‘욕구단계론’에서 하위 욕구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욕구들은 유기체의 생존, 소속, 그리고 인정 욕구를 반영한다. 이 욕구 동기들의 목적은 결손 상태, 즉 배고픔, 추위, 불안으로부터 야기될 유기체의 긴장(緊張)을 미리 막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손동기는 하위 욕구단계이긴 하지만 동시에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일 뿐만 아니라 성장동기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결손동기는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장동기가 나타나기 위해 만족되어야 할 전제조건이다.

결손동기와 대조적으로 성장동기는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려는 선천적 충동과 관련이 있다. 성장동기의 목적은 경험을 넓힘으로써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삶의 기쁨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긴장의 감소를 목적으로 하는 결손동기와는 대조적으로 성장동기는 결손 상태의 회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인간이 심리적 건강을 유지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결손동기와 성장동기가 모두 만족되어야 한다. 만약 성장동기가 만족되지 못하면 무관심, 소외, 우울, 냉소(冷笑)와 같은 병리적 현상을 보일 수 있다.

훌륭한 인재들이 의료계에 많은 것은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의사가 되려는 주목적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의 단계인지, 또는 불안함으로 벗어나려는 안전의 단계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소속과 인정에의 욕구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결손동기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의료행위를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타인의 안녕에 보람을 느낀다면 이는 성장동기에 의한 것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자신의 적성과 자질에 맞는 일을 하면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있다. 사회는 각 개인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도전을 할 수 있게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국민 건강의 증진과 의료업의 발달은 단지 고등학교 시절 공부 잘한 의사들만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의료계의 비약적인 발전은 과학 발전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뛰어난 의공학 계통의 연구와 실질적인 발전이 없다면 의학도 발전할 수 없다. 또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의학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과 긴밀한 협조를 해야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특정 분야에만 쏠린다는 것은 멀리 보면 자신을 위해서도, 또한 사회를 위해서도 우려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