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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관련된 다양한 표현 배후에는 '神'이 존재한다는 믿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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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관련된 다양한 표현 배후에는 '神'이 존재한다는 믿음 있어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41)] 인간 삶의 기저에는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인간들은 부지불식간에 신과 함께 살고 있다.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기도 하고 참사랑으로 영원한 존재인 신과 닿고자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인간들은 부지불식간에 신과 함께 살고 있다.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기도 하고 참사랑으로 영원한 존재인 신과 닿고자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최근 한 언론 매체에서 이스라엘 연구진이 난자와 정자 없이 줄기세포만으로 인공배아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제목으로 '신의 영역 침범 논란'이라고 달았다. 이 배아는 동물로 자라진 못하지만 생식세포의 결합 없는 인공배아는 자연의 섭리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윤리 논란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자연의 섭리에 벗어나는 것이 곧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 글의 목적은 난자와 정자의 결합 없이 인공배아를 만드는 것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지에 대한 윤리적인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학을 공부하는 필자에게는 적절한 주제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이 글에서 생각해보려는 주제는 우리 주위에서 많이 쓰이는 '신(神)'이란 존재가 우리 삶에 미치는 역할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중에는 '신(神)'과 관련된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처리하거나 해결하는 데에 매우 뛰어나거나 기묘한 수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신의 한 수'라는 표현을 쓴다. 예를 들면, 최근 유명한 한 시사평론가는 휴가 중인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미국 하원의장을 직접 만나지는 않고 전화 통화만을 한 것을 '신의 한 수'라고 표현했다. 휴가 중인 대통령의 일정과 또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등을 고려해 전화 통화만을 한 것은 “내친 거도 아니고, 만나주기도 뭐한 상황이고, 묘책을 찾은 것 같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절묘한 방책이 신의 한 수라는 것이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 미국 하원의장은 대만을 방문하여 전 세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대만 방문 이틀째에 타이베이에서 대만 반도체의 살아있는 '신(神)'으로 불리는 인사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신'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곳이 바둑계이다. 바둑에서는 최고의 단수가 9단인데, 9단을 따는 것을 '입신(入神)'이라고 부른다. 9단은 신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렇듯 사람의 솜씨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놀랍도록 세밀하고 교묘한 단계에 도달한 상태를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의 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귀신(鬼神)'도 있다. 우리 속담에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것도 있고,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귀신에 씌였다"라는 표현도 있다. 이 표현들에도 '신'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신'과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의 배후에는 '신(神)'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 신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의와 그 신과 현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하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지 않는다면 신이 들어가는 모든 표현은 의미가 없어진다. "신명(神命)을 받든다"라는 표현을 예로 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명을 받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명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에 벗어나는 것이 신의 영역 침범
어떤 일을 해결할 때 매우 뛰어나면 '신의 한수'
신이 없다면 존재의 명 받든다는 것은 무논리
물론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한다고 믿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주제는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아니다. 신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해 변증(辨證)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리학을 공부하는 필자가 다룰 주제도 아니다.

'신'과 함께 많이 쓰이는 대상이 '하늘'이다. 자주 쓰이는 것 중에 하나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이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 결과는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는 표현도 있다.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 '덕기천성(德器天成)'은 "덕망 있는 큰 인물은 하늘이 내린다"라는 뜻이다.

동양의 성현 공자도 '死生有命 富貴在天(사생유명 부귀재천)'이라고 말씀하셨다. 뜻을 풀어보면 "죽고 사는 것이 명에 달려 있고, 부하고 귀한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맹자도 '順天者存 逆天者亡(순천자존 역천자망)'이라고 가르쳤다. 그 뜻은 "하늘의 명을 따르는 자는 살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순명(順命)' 즉,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삶이 우리의 원하고 노력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더 큰 힘, 즉 하늘에 달려있다고 믿으며 좌절하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하늘을 조금 인격화하고 구체화하면 하늘에 계시는 '님', 하느님이 우리 삶에 나타난다. 애국가에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이 있을 만큼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가깝게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국의 국가에도 "하느님, 자비로운 우리의 여왕을 구원하시고 고귀한 우리의 여왕이 만수무강하게 하소서(God save our gracious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빌고 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신(god)'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신과 함께 살고 있는 것과 신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믿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즉 유대교나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처럼 신의 존재를 믿고, 그 믿음의 기반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거나 평소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부지불식간에는 신을 찾고 부르고 위로를 받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면, 기막힌 일을 당하거나 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 맙소사!"라는 탄식을 하게 된다.

더불어 비록 특정 종교를 믿고 그 교리를 따르지는 않지만, '하늘나라'를 믿고 살아가고 있다. 장례식장에 가면 "착하게 살았으니 저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살거야" 등의 덕담을 많이 한다. 살면서 아파서 많이 고통스러워했던 사람을 보내는 영결사(永訣辭)에는 빠짐없이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죽어서 저 세상에서 반갑게 다시 만나자'라는 말도 종종 들린다. 이런 말들 속에 암암리에 나타나는 '하늘나라'의 이미지는 '고통과 슬픔이 없는 곳', 즉 즐거움과 행복만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대상이나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그 인식의 결과로 느끼는 두려움이 그 믿음을 가지는 근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피하려고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결국, 인간의 가장 큰 과제는 완벽할 수 없는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죽음으로 제한적인 삶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대비되는 대상으로서의 신과, 신의 완전성과 절대성과 일체가 되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고해(苦海)와 같은 '이' 세상과 대비되는 슬픔과 고통이 없는 '저' 세상을 상정하고 그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작용은 특정 종교를 믿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물론 일반적으로 종교는 절대자나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하고 추종하고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자 역할이다. 하지만 종교는 반드시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종교를 믿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삶의 근저에 있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