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지진, 수도 이전 건의 일본 기상청 14만2000명 사망 3만7000명 실종

기사입력 : 2019-06-24 14:06 (최종수정 2019-07-0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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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지진 1923년 그때 그 순간.
일본 도쿄에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 수도 도쿄에 지진이 간혹 일어나지만 가장 참혹한 도쿄 지진은 1923년의 간토 대지진이다.

간토 대지진은 일본의 간토 지방 즉 도쿄 등지에서 일어났다.

지진 발생일 1923년 9월 1일, 발생시간은 11시58분 32초다. 지진은 4분이나 지속됐다.

일본 도쿄 앞 가나가와현 사가미 만이 진앙지다.

1855년에도 간토 지방에서 대지진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간토 대지진은 1923년 도쿄 앞 가나가와현 사가미 만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말한다.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1905년, 도쿄 제국대 교수 오오모리 후사키치(大森房吉)와 이마무라 아키츠네(今村明恒)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이마무라 교수는 도쿄 남쪽의 사가미 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도쿄 전역은 대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마무라의 예측은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아 다른 학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여러 번 지진 예측에 성공한 세계적인 지진학자였던 오오모리 교수는 이 예측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오오모리 교수는 정기적인 소규모의 지진 발생은 단층의 지진 응력을 해소해 지진의 위험성을 줄인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간토 대지진 발생 직전까지도, 도쿄에서 1921년 말, 1922년 중반, 1923년 초에 주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도쿄 지역에서의 대지진의 위험성이 해소되었음을 주장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발생으로 오오모리의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간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발생한 세 차례의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규모 7.8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58분에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15초간 일어났다.

규모 7.3의 첫 번째 여진이 12시1분에 일어났다.

두 번째 규모 7.2의 여진이 12시3분에 발생했다.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지진 후 간토 지방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 11시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다.

도쿄를 비롯한 지진 피해 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 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 나갔다.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며 4~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지바현,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2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7000명이 실종되었다. 10만9000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2000여 채는 반파 되었다. 마천루인 료운카쿠도 붕괴되었다.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로 전면을 다루고 있다.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 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다.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했다.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쥬고엔 고주센)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예를들어 '쥬고엔 고주센'을 일본어가 어눌한 발음의 '츄고엔 고쥬센'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이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잔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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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지진으로 10만~14만 명이 사망하고 3만7000여 명이실종되자 일본 언론은 유언비어를 조장해 광기어린 한국인 살육을 저질렀다.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다.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학살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고 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돼 그제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했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다. 히메지, 경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일본 기상청이 수도 이전을 건의하기도 했다.


김재희 기자 tiger8280@g-enews.com 김재희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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