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약스 (Ajax) 돌풍의 비결은? 유벤투스 이어 손흥민 토트넘과 운명의 승부… 챔피언스리그 4강전

기사입력 : 2019-04-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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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약스가 유벤투스를 호날두의 꺾고 챔피언스 리스 4강에 올랐다. 아약스 (Ajax) 돌풍의 비결은? 유벤투스 이어 손흥민 토트넘과 운명의 승부… 챔피언스리그 4강전
아약스 돌풍, 손흥민 토트넘과 운명의 승부. 챔피언스리그 4강전 조편성 AFC 아약스

아약스가 유벤투스를 호날두의 꺾고 챔피언스 리스 4강에 올랐다.

아약스는 17일 이탈리아 토리노의 알리안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벤투스(이탈리아)와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8강 2차전 원정 경기에서 2-1로 이겼다.

결국 약스는 1, 2차전 합계 3-2로 4강에 진출했다.

아약스가 UCL 4강에 오른 것은 1996-1997시즌 이후 22년 만이다.

아약스 수비수 더리흐트는 결승골을 터뜨렸다.

손흥민의 토트넘이 8강전을 통과할 경우 4강전에서 아약서 트트넘의 빅매치가 성사된다.

아약스는 토트넘-맨시티의 승자와 4강에서 맞붙는다.

아약스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jax Amsterdam)을 연고지로 하는 네덜란드의 프로 축구 클럽이다.

클럽의 명칭 아약스란 말은 전설적인 그리스 영웅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약스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 중 하나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연속으로 유러피언컵을 제패하였다. 1972년에는 에레디비시, KNVB컵, 그리고 유러피언컵을 우승하며 대륙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아약스는 대륙 트레블과 인터콘티넨털컵 우승을 같은 해에 달성한 3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첼시와 더불어 3개의 UEFA 주요 클럽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아약스는 인터콘티넨털컵을 두 차례 우승하였고, UEFA컵 1991-92도 우승하였으며, 1962년에는 UEFA 인터토토컵의 전신인 칼 라판 컵도 우승하였다.[6] 아약스는 1996년에 처음 개장한 요한 크라위프 아레나에서 홈 경기를 치른다. 그 이전에는 더 메이르 스타디온과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 (국제 경기) 에서 홈경기를 개최했다.

아약스는 1900년 3월 18일, 암스테르담에서 창단되었다. 1911년, 클럽은 네덜란드 1부 리그에 승격되었으며, 1917년에 네덜란드 국가 컵대회인 KNVB 베커를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주요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다음 시즌, 아약스는 처음으로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클럽은 1918-19 시즌에 리그를 우승하였으며, 네덜란드 축구 리그 선수권에서 무패우승을 거둔 유일한 팀이 되었다.

1920년대에 아약스는 지역 강호였으며, 서부 에이르스터 클라세를 1921년, 1927년과 1928년에 우승하였으나, 이러한 성공을 국가 단위 대회에서 거두지는 못하였다.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위상이 변하였고, 클럽은 5차례 리그를 우승 (1930-31, 1931-32, 1933-34, 1936-37, 1938-39) 하였으며, 이 시기에 가장 성공적인 네덜란드 팀으로 비상하였다. 아약스는 1942-43 시즌에 두 번째 KNVB컵을 우승하였고, 1917년 KNVB컵 우승 당시부터 3차례나 클럽을 지휘했던 잉글랜드의 잭 레이놀드가 맡은 마지막 시즌인 1946-47 시즌에는 8번째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7][8]

1956년, 새 프로 리그인 에레디비시가 출범하였고, 에레디비시 첫 시즌에 아약스는 원년 멤버로 참가하였다. 암스테르담 연고의 클럽은 이 새로 출범한 리그의 초대 우승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유러피언컵에 데뷔하였으나, 8강에서 헝가리 챔피언 버셔시에게 합계 2-6으로 패하였다. 팀은 1959-60 시즌에 또다시 에레디비시 우승을 차지하였고, 1961년에는 3번째 KNVB컵 우승을 거두었다.

요한 크라위프는 아약스에서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또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활약하며 3번의 유러피언컵을 우승하였다; 그의 등번호였던 14번은 아약스가 영구 결번시킨 유일한 번호이다. 크라위프는 1985년에 클럽에 돌아와 1988년까지 감독을 역임하였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클럽에서 선수로 활약하였던 리뉘스 미헐스는 1965년에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아약스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명사가 된 그의 토털 풋볼 철학을 주입시켰다.[9][10] 그로부터 1년 전, 네덜란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회자될 요한 크라위프가 데뷔하였다.[11] 미헐스와 크루이프의 협력으로 아약스는 클럽 역사상 황금기를 맞이하였는데, 이 시기에 클럽은 7차례의 에레디비시, 4번의 KNVB컵, 3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였다.

아약스는 1965-66, 1966-67, 그리고 1967-68 시즌의 에레디비시 우승을 거두었고, 1969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밀란에게 패하였다. 1966-67 시즌, 아약스는 에레디비시에서 기록적인 122골을 득점하였고, KNVB컵도 우승하여 역사상 첫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하였다. 1969-70 시즈, 아약스는 5시즌 안에 4번째 리그 우승과 함께 두번째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하였고, 이때 34번의 리그 경기에서 27번의 경기에서 승리하였고, 100골이나 득점하였다.

1970-71 시즌, 아약스는 KNVB컵 타이틀을 방어하였고, 1971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디크 판 데이크와 아리 한의 연속골로 파나티나이코스를 2-0으로 격파하고 처음으로 대륙 챔피언이 되었으며, 크라위프는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성공을 거둔 후, 미헐스는 클럽을 떠나 바르셀로나의 감독을 역임하게 되었고, 후임으로 루마니아의 슈테판 코바치가 사령탑에 취임하였다. 코바치의 첫 시즌에, 아약스는 유러피언컵, 에레디비시 우승과 함께 KNVB컵 3연패에 성공하면서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그 다음 시즌, 팀은 아르헨티나 클럽 인디펜디엔테를 꺾고 인터콘티넨털컵 1972를 우승하였으며, 에레디비시와 유러피언컵 타이틀을 방어하였고, 1950년대 레알 마드리드이래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을 3연패한 클럽이 되었다.

1973년, 미헐스의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를 카탈루냐로 데려가면서 세계 이적료 기록을 경신하였다. 코바치 또한 시즌 종료 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기 위해 클럽을 떠났고, 이는 클럽 전성기의 종말에 신호탄이 되었다.

1976-77 시즌, 아약스는 4시즌 만에 처음으로 리그를 우승하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에레디비시와 KNVB컵 더블을 달성하였다.

1980년대 초, 요한 크라위프가 클럽에 복귀하였고, 마르코 판 바스턴이나 프랑크 레이카르트같은 신예 선수들이 등장하였다. 팀은 1981-82 시즌과 1982-83 시즌에 에레디비시 2연패를 성공하였고, 이 세 선수들이 모두 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크라위프가 1983년에 라이벌 구단 페예노르트로 매각된 뒤, 판 바스턴은 아약스의 주요 선수가 되었고, 1983-84 시즌부터 1986-87 시즌까지 4시즌 연속으로 에레디비시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12]

1985년, 크라위프는 아약스 감독으로 클럽에 복귀하였고, 그가 부임한 첫 시즌을 34경기 120골로 마쳤다. 그러나, 아약스는 PSV 에인트호번과 승점 8점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 다음 시즌, 아약스는 PSV에게 또다시 에레디비시 타이틀을 내주어야 했으나,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거두며, 14년만에 처음으로 대륙 우승을 하였다. 그 후, 크라위프는 클럽을 떠나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되었고, 레이카르트와 판 바스턴은 각각 스포르팅 CP와 밀란으로 매각되었다. 팀 주축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아약스는 이듬 해인 1988년에도 UEFA 컵위너스컵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벨기에의 메헬렌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88-89 시즌, 1986년에 크라위프 감독 지도 하에 데뷔하였던 젊은 공격수 데니스 베르흐캄프가 아약스의 주전 골잡이가 되었다. 베르흐캄프는 아약스가 에레디비시 1989-90 우승을 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1990-91 시즌, 1991-92 시즌, 그리고 1992-93 시즌에는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루이스 판 할 감독의 지도 하에, 아약스는 1992년에 UEFA컵을 우승하였고, 이로써 아약스는 유벤투스에 이어 3개의 주요 유럽대회를 모두 우승한 두번째 클럽이 되었다.

베르흐캄프가 1993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하자, 판 할은 프랑크와 로날트 더 부르, 에드빈 판 데르 사르, 클라렌서 세이도르프, 엣하르 다비츠, 마이컬 레이저허르, 그리고 빈스톤 보하르더 등의 아카데미 졸업생들과 피니디 조지, 은완코 카누, 그리고 야리 리트마넨등의 민첩한 외국 용병, 그리고 베테랑 주장 다니 블린트로 구성된 젊은 아약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재영입하였다.[13] 팀은 1993-94 시즌에 네덜란드 정상을 탈환하였고, 1994-95 시즌과 1995-96 시즌에도 우승을 거두며 1968년 이래 아약스는 처음으로 리그 3연패를 달성하였다. 판 할 시대의 성공 정점은 1994-95 시즌에 찾아왔는데, 아약스는 이 시즌에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에레디비시를 무패우승한 클럽이 되었다.[14] 이 팀은 밀란과의 1995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당시 18세였던 파트리크 클라위버르트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영광의 1970년대 이후로는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을 획득하였다. 아약스는 이듬해 결승전에도 올랐으나, 유벤투스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패하였다.

아약스의 유럽 정상 지위로의 기간을 판 할과 몇 명의 주축 선수들이 대륙의 더 큰 클럽들로 이적하면서 금새 끝나버렸다. 2000년대는 클럽이 추락하는 시기로, 이 시기에 고작 두 차례의 에레디비시를 우승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아약스의 아카데미는 계속해서 베슬레이 스네이더르나 라파엘 판 데르 파르트와 같은 스타 선수들을 배출하였다.

2010년, 프랑크 더 부르는 아약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2010-11 시즌에 팀을 7년만의 리그 우승이자 기록적인 30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2011-12 시즌과 2012-13 시즌에도 같은 업적을 달성하며 1990년대 이래 더 부르 감독이 선수였던 시절에 이룬 업적과 동률을 이루었다. 2013-14 시즌, 아약스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에레디비시 4연패에 성공하였다.


김재희 기자 tiger8280@g-enews.com 김재희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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