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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박항서 베트남 요르단 영웅, 알고보니 만년꼴찌… 경남 산청 생초면→ 경신고 한양대 → FC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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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박항서 베트남 요르단 영웅, 알고보니 만년꼴찌… 경남 산청 생초면→ 경신고 한양대 → FC 서울

박항서 사랑해요 박항세오  베트남 요르단 승부차기 영웅 , 명예 시민권 부여… 한국 바레인 또 한번의 승부수이미지 확대보기
박항서 사랑해요 박항세오 베트남 요르단 승부차기 영웅 , 명예 시민권 부여… 한국 바레인 또 한번의 승부수
[글로벌이코노믹 김재희 기자] 박항서 사랑해요 베트남 요르단 전 현지 언론의 반응, 명예 시민권 부여

박항서의 베트남 축구가 아시안컵 16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요르단을 꺾고 8강에 올랐다.
꼴찌로 간신히 16가에 오른 베트남이 조 1위의 요르란을 꺽는 대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후반 6분 스트라이커 응우옌 꽁푸엉이 동점 골을 뽑아내는 순간부터 베트남 전역이 거대한 응원장으로 변하는 듯했다.

부루젤라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베트남, 꼬렌(파이팅)'을 외치는 목소리는 점차 커져만 갔다.

소셜미디어에는 박 감독을 응원하는 글이 쇄도했다.

"베트남은 박항서 감독님을 사랑한다"면서 "오늘날의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있게 해주신 박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글을 올렸다.

"나의 위대한 영웅 박항서가 이 베트남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고 극찬했다.
현지 매체들도 박항서호의 8강 진출 소식을 앞다퉈 보도했다.

팜 빈 민 베트남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은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에 대해 "베트남 국민의 마음에 이미 명예시민이 됐다"고 말했다.

박항서 감독은 작년 초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에서 사상 처음으로 준우승 신화를 만들었다.

이어 9월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했다.

12월에는 아세안축구연맹 스즈키컵에서 10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박항서는 1959년 1월 4일 경남도 산청군 생초면 에서 태어났다.

박항서(朴恒緖)는 생초초등학교 생초중학교 경신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제19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하는 20세 이하 청소년 대표로 선발됐다.

1984년 럭키금성 황소 (현재의 FC 서울)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1985년 K리그 우승과 1986년 K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1988년 은퇴한 직후에 1996년까지 LG 치타스에서 코치로 지내다가 1997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옮겨 활동했다.

1994년 FIFA 월드컵 때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활약하였다.

2002년 FIFA 월드컵 4강을 이룩하는데 공헌을 했다.

월드컵 후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으나 정식 계약을 하지 않아 무보수 임시 감독이라는 논란에 휘말렸다. .

뒤늦게 정식 계약을 맺었지만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는 데 그쳐 폐막 후 경질되었다.

2007년 12월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에 취임하여 2008년 삼성 하우젠 컵 준우승과 2009 시즌 6위로 챔피언십 진출 및 최종 4위를 이끌었다.

2010 시즌에는 10위에 그쳐 사임했다.

2011년 상주 상무의 감독직에 올라 1부 리그로 승격했다가 1년만에 2부리그로 강등했다.

박항서는 2013년 2부리그의 명칭 변경 후 2013년 K리그 챌린지에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최초 K리그 챌린지 1위에 오르며 1년만에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하였으나 승격하자마자 K리그 클래식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2014년 K리그 클래식 12위로 1년만에 재강등되는 등 강등의 아픔을 두번이나 겪었다.

2017년 창원시청 축구단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6월에 개최한 내셔널선수권 우승을 차지했으나 후반기가 접어들수록 여름 이적시장에서 전력 보강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계를 드러내며 순위가 급하락했다.

2017년 9월 29일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다.


김재희 기자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