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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분석] 일본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어떤 기업? 카미카제 전투기 생산 대표적 전범기업…대법원 판결 거부 강제징용 배상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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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분석] 일본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어떤 기업? 카미카제 전투기 생산 대표적 전범기업…대법원 판결 거부 강제징용 배상 못한다

[기업분석] 일본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강제징용 배상 거부 …카미카제 전투기 생산   2차대전 대표적 전범기업...사진은 미쓰비시 창업주
[기업분석] 일본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강제징용 배상 거부 …카미카제 전투기 생산 2차대전 대표적 전범기업...사진은 미쓰비시 창업주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일본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이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 대법원은 29일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그 유족 1명 그리고 강제징용 피해자 6명이 각각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짓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강제 징용에 대한 일본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일본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극히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이날 홈페이지에 올린 입장문에서 "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한일청구권 협정과 이와 관련한 일본정부의 견해 그리고 일본에서 내려진 확정판결에 반하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배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은 일본 3대 재벌인 미쓰비시 그룹의 핵심 축이다.

미쓰비시 그룹의 역사는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쓰비시 그룹의 창업주는 이와사키 야타로 (岩崎彌太郞) 이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기업가.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의 창설자이다.

이와사키 야타로 (岩崎彌太郞) 1835년 시코쿠[四國] 섬에 위치한 도사 번(土佐藩)에서 태어났다. 도사 번(土佐藩)은 지금의 고치현(高知縣) 아키시(安芸市) 일대 이다.

이와사키 야타로 (岩崎彌太郞)의 집안은 원래 하층 무사(武士)인 향사(郷士) 였다.

증조부 때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향사의 신분을 팔아넘겨 지게로닌(地下浪人)에 속했다.

14살때 도사 번의 번주(藩主)인 야마우치 도요테루(山内豊熈)에게 발탁되어 지금의 도쿄인 에도(江戸) 유학을 했다.

1858년 번주인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 에게 등용되었다. 1867년에 도사 번에서 경영하는 상사(商社)인 개성관(開成館)의 나가사키 상회(商會) 주임(主任)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서구의 상사들과 교역을 하며 비지니스맨으로서의 수완을 익혔다. 1868년 나가사키 상회가 폐쇄되면서 개성관의 오사카 상회로 옮겨 해운업에 종사했다.

오사카 상회는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69년 도사 번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기업이 되었다. 그이름은 쓰쿠모 상회(九十九商會)이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번(藩) 이 폐지되고 현(縣)이 설치되는 폐번치현(廢藩置縣) 외중에 도사 번의 부채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배 2척을 구입하여 해운업을 시작했다. 또 쓰쿠모 상회를 인수하여 미쓰비시 상회(三菱商會) 를 설립했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특히 메이지 정부의 화폐개혁 과정에서 정부의 고위관리와 결탁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메이지 정부는 1874년부터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각 번(藩)들이 발행했던 번찰(藩札)과 교환해주기 시작했는데 메이지 정부의 고관이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를 통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번찰들을 대량으로 사들여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미쓰비시 상회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정부의 해상 운송을 독점했다.

1874년 메이지 정부가 대만(臺灣)을 침략했을 때 병사들과 군수품의 운송을 맡았다. 사가(佐賀) 의 난과 세이난 전쟁( 西南戰爭)등 내란에서도 운송을 독점하면서 돈을벌었다.

1875년 일본이 한국의 강화도를 침략할 때에도 군수품을 싣고온 배가 바로 미쓰비시 상회의 배들이었다.

처음 2척의 배로 시작된 미쓰비시 상회는 1877년에는 61척의 기선을 소유한 거대 해운사로 컸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1885년 2월 7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미쓰비시 상회는 이와사키 야타로 사후에 미쓰이 그룹이 주도한 경쟁 운수회사를 인수해 일본우선(日本郵船)을 설립했다.

미쓰비시 상회은 이때부터 해운업은 물론 광산 ·탄광, 조선소 은행업에도 뛰어들었다.

1893년 미쓰비시 합자회사로 개편하면서 사업회사로서 다각적 사업을 은행 ·광산 ·조선 ·영업의 각부로 편성하여 종합적으로 관리하였다. 도쿄 해상, 메이지 생명, 미쓰비시 제지, 기린 맥주, 아사히 유리 등을 방계회사로 거느렸다. 1916년 부터는 미쓰비시의 각 사업부를 조선 ·제철 ·창고 ·광업 ·상사 ·은행 등의 주식회사로 조직했다. 미쓰비시 합자가 지주회사로서 총 사령탑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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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분석] 일본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강제징용 배상 거부 …카미카제 전투기 생산 2차대전 대표적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그 과정에서 특히 조선 ·광업 부문을 토대로 전기 ·항공기 ·화학 ·석유 등 중화학공업부문에의 주력했다.

미쓰비시 합자를 지주회사로 한 미쓰비시 재벌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미국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강제 해체되었다.

이후 일본 경제가 다시 살아나면서 1954년 미쓰비시 상사를 부활시켰다.

지금은 미쓰비시 도쿄 UFJ 은행과 미쓰비시 상사 그리고 미쓰비시 중공업등 3개 사가 미쓰비시 그룹의 핵심 기업이다. 일본 기업 연합 중에서 가장 결속력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조직의 미쓰비시’라고 불린다.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그룹과 함께 일본의 3대 재벌 그룹이다.

미쓰비시는 대표적인 일본의 극우 기업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군수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강제 연행한 조선인의 노동력을 사용했다. 하시마 섬 등에서 비인간적인 대우와 급여 체불을 일삼았다.

그 당시 미쓰비시가 주로 생산했던 제품은 가미카제 폭격을 하기 위한 제로센 전투기와 잠수함 등 군용 장비였다.

미쓰비시는 제2차 대전 당시 강제 노동에 징용됐던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포로와 가족들에게는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피해자들에게는 여태까지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미쓰비스 중공업의 대주주로는 일본 트러스티 서비스 신탁은행 일본 마스터 트러스트 신탁은행 노무라 신탁은행 야스다 생명보험 상호회사 JP 모건 체이스 뱅크 도쿄 해상 일동 화재보험 (주)등 이 있다.

자회사로는 미쓰비시 히타치 파워시스템스(주) 미쓰비시 항공기 (주) 미쓰비시 마힌드라 농기계 (주) 미쓰비시 히타치 제철 기계 (주) 등이 있다.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