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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들국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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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들국화는 없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태풍이 지나간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점점이 떠 있는 뭉게구름과 쪽빛하늘 한 귀퉁이에 흩어놓은 새털구름이 가을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때 아닌 가을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갔지만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을 바라보면 이미 가을이 깊다는 것을 절감한다.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들길을 따라 걷다가 보랏빛 향기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니 논둑에 개미취가 군락을 이루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바야흐로 국화의 계절이 온 것이다.

일조량이 짧아지고 외기가 서늘해지면서 들판으로 나서면 쑥부쟁이를 비롯한 개미취, 구절초, 산국, 감국 같은 국화과의 꽃들이 부쩍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을의 산과 들에서 만나는 국화과의 꽃들을 흔히 들국화라 부른다. 하지만 식물도감에는 들국화란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들국화는 많은 사람들이 가을에 피어나는 국화과의 모든 꽃들을 뭉뚱그려 둘국화로 부르는 것일 뿐이다. 이 칼럼에 ‘들국화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단 까닭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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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색(色)으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향기로 발길을 잡아끈다. 그중에도 조락의 계절에 산과 들에서 만나는 국화과의 꽃들은 우아한 꽃빛과 은은한 향기로 우리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오죽하면 어느 시인은 ‘국화가 없다면 가을도 없다’고 했을까. 진노랑색의 산국은 감국(甘菊)과 함께 가을 들녘을 맑은 향기로 가득 채우는 국화과의 대표 선수라 할만하다.

산속에서 마주치는 산국은 은일화(隱逸花)란 옛 이름처럼 세속을 떠난 은자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대부분의 꽃들이 남에서 북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피어나는 것과는 달리 산국이나 감국 같은 국화과의 꽃들은 높은 곳에서 먼저 피기 시작하여 낮은 곳으로 이어진다. 약간 쓴맛이 나는 산국은 예로부터 약재로 쓰이고, 이름처럼 단맛이 나는 감국(甘菊)은 국화차를 만들거나 술을 담가 그 맛과 향을 즐겼을 만큼 우리에게 친근한 꽃이다. 국화차는 흰 서리를 열흘 이상 맞은 꽃을 골라 따서 차를 만들어야 제대로 된 맛을 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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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 죽었다 다시 피어나도 처음 모습 그대로 피어난다는 구절초는 희거나 연한 분홍색의 꽃이 핀다. 구절초(九節草)란 이름은 아홉 번 꺾이는 풀 또는 음력 9월 9일에 꺾는 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땅속줄기에 9개의 마디가 생길 때 약효가 가장 좋다는 말도 있다. 구절초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선모초라고도 하는데 구절초를 달여 먹으면 부인병이 없어지고 옥동자를 낳을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종류만도 산구절초, 바위 구절초, 한라구절초, 포천구절초 등 그 종류가 30여 가지나 될 만큼 다양하다.

이외에도 보라색 꽃이 피는 쑥부쟁이나 개미취, 그리고 벌개미취도 모두 국화과의 식물이다. 산길에 무리를 지어 흐드러지게 피는 쑥부쟁이나 깊은 산에서 주로 피는 큰 키의 개미취, 벌판에서 주로 자라는 벌개미취는 보랏빛 향기를 가을하늘에 풀어놓으며 색으로, 향기로 우리의 메마른 감성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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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고 들길을 걸어온 스스로를 ‘무식한 놈’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자주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모르면 당황스러운 것처럼 예쁜 꽃을 보고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그처럼 답답한 일도 없다. 물론 꽃 이름을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안도현 시인처럼 꽃 이름을 모른다고 스스로를 무식하다 탓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꽃을 좋아하고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꽃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