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향기] 그리움이 꽃을 피운다 -상사화

기사입력 : 2018-09-1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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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누군가가 그리우면 가을이다. 어느 시인은 물소리 깊어지면 가을이라고 했지만 까닭 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나는 내 안에도 가을이 당도했음을 직감한다. 녹음을 짙게 드리우던 초목들이 물 긷는 일을 멈춘다는 처서를 지나 풀잎에 찬 이슬 내린다는 백로도 지났으니 절기상으로도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불볕더위가 멈칫한 사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가을꽃 축제 소식에 훌쩍 꽃을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각 지역마다 가을꽃 축제가 다양하게 펼쳐지지만 그 중에 백미는 누가 뭐래도 영광 불갑사 일원에서 열리는 상사화 축제가 아닐까싶다. 붉게 타는 노을빛을 닮은 꽃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 가을 숲은 온통 붉은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처럼 황홀경을 연출한다. 잎과 꽃이 피는 시기가 서로 달라 만나지 못하는 생래적 그리움과 거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처럼 애달픈 전설까지 얹어지면 꽃 중에 이보다 슬픈 꽃도 없지 싶은데 정작 상사화는 여느 꽃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꽃빛과 자태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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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해마다 가을이면 상사화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가을 축제에서 만나는 꽃은 상사화가 아닌 석산(꽃무릇)이다. 상사화와 같은 속에 속하고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점은 상사화의 특징을 지녔지만 꽃무릇은 상사화보다 늦게 피고 훨씬 꽃잎 조각이 깊게 갈라져 있으며 꽃빛도 진한 주홍색이다. 꽃무릇은 주로 사찰 주변에 많이 심어 우리나라 3대 꽃무릇 하면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를 꼽는다.

상사화는 봄이 되면 싱싱하고 단단해 보이는 잎들이 다보록하게 올라와 무성하다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스러져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는 우리가 더위에 지칠 즈음 어느 여름날 불쑥 허공으로 기다란 꽃대를 밀어 올려 연분홍의 꽃송이를 소담스레 피워단다. 잎과 꽃이 피는 시기의 간극이 커서 다소 생뚱맞아 보이지만 실은 봄에 잎들이 열심히 만들어 알뿌리에 비축해 두었던 양분의 힘으로 꽃대를 올리는 것이다. 여름에 피어나는 연분홍의 상사화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원예종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진노랑상사화나 붉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주황색으로 피는 백양꽃 등은 결실을 맺는다.

상사(相思)는 서로를 생각하는 그리움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듯이 인연이란 스치지 않으면 맺어질 수 없고, 만남 없이 생겨나지 않는 게 그리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잎과 꽃의 어긋난 시간에서 상사화란 이름을 떠올린 것은 사람의 마음이 투영된 것 같아 꽃보다 더 애틋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잎은 잎대로, 꽃은 꽃대로 저마다의 할 일에 충실할 뿐인데 그 어여쁜 꽃에 상사화란 슬픈 이름을 붙인 것은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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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옛날 어느 절집에 병든 아버지를 위해 탑돌이 하러 온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다. 우연히 그 여인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스님이 홀로 가슴앓이 하다가 연모의 정을 견디지 못해 병들어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상사화의 전설은 애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일까. 상사화의 꽃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불가에서 이르는 말 줄 중에 시절인연이란 게 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말이다. 만나야 할 인연이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되고, 만날 수 없는 인연은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한다.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절로 익어 벌어지듯 인연도 그렇게 오고간다는 뜻일 게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이 다르고, 꽃을 만나는 마음가짐 또한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높아만 가는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그리움의 꽃송이를 환하게 밝힌 꽃무릇의 장관을 만나는 일은 어렵게 맞이한 이 가을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해 줄 것이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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