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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토지공개념 개념과 유래, 사회주의 경계… 헨리 조지~ 노태우 문재인 보유세 헌법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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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토지공개념 개념과 유래, 사회주의 경계… 헨리 조지~ 노태우 문재인 보유세 헌법개정안

[김박사 경제진단] 토지공개념 개념과 유래, 사회주의 자본주의 경계… 헨리 조지부터 노태우 노무현  문재인 헌법 개정안까지이미지 확대보기
[김박사 경제진단] 토지공개념 개념과 유래, 사회주의 자본주의 경계… 헨리 조지부터 노태우 노무현 문재인 헌법 개정안까지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토지공개념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정부의 개헌안을 설명하면서 토지공개념을 명문으로 포함시키겠다고 하면서 사상 논쟁으로까지 비화되는 모습이다.
토지공개념은 주류경제학에서 인정받은 공인된 것은 아니다.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해온 개념이다. 건국 초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하면서 처음 꺼냈다,

그 후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77년 8월 신형식 당시 건설부 장관이 전경련에서 “우리나라 같이 땅 덩어리가 좁은 나라에서는 토지의 절대적 사유화란 존재하기 어렵고 주택용 토지,일반 농민의 농경지를 제외한 토지에 대해 공개념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주목을 끌었다. 그 다음해인 1978년 물가 억제 대책인 8·8 조치를 발표하면서 토지공개념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권 때인 1989년 택지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과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토지초과이득세 등 세 가지 법률이 나오면서 토지공개념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회자됐다.

이른바 토지 공개념 3법이라는 토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 그리고 토지개발이익환수제 등 세 가지 법이 만들어졌다.

택지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6대 도시에서 1가구가 200평 이상의 택지를 취득할 때 허가를 얻도록 하고 초과 보유 시 부담금을 물리는 것이다. 토지초과이득세는 개인이 소유한 유휴 토지나 법인의 비업무용 토지의 가격이 올라 발생한 이득의 일부를 세금으로 환수하는 제도였다.

택지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은 1999년 위헌 판결을 받았다. 토지초과이득세는 1994년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서 제도 내용이 수정돼 97년 재 시행되기도 했으나 결국 1998년 공식 폐지됐다. 이처럼 토지공개념 3법은 위헌 시비에 시달리며 무력화됐다.
참여정부 들어오면서 토지공개념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국회 시정 연설에서 부동산 안정대책을 준비 중이며 토지공개념 도입까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종합부동산세와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등 토지공개념에 기반을 둔 제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역시 거센 반발에 부딪혀 유야무야됐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토지공개념이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토지공개념의 학문적 뿌리를 굳이 따지자면 헨리 조지를 언급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지난해 7월 헨리 조지 세미나를 열었다. 토지공개념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헨리 조지는 미국 대륙횡단열차 속에서 토지공개념의 발상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의 대륙 횡단 열차는 1869년 완공됐다. 금의 발견으로 골드러시가 일어난 지 20년 되던 해이다. 그 해 5월10일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대역사가 마침내 마무리됐다.

그해 뉴욕의 한 허름한 인쇄소에서 활자 뽑는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가던 헨리 조지는 새로 뚫린 대륙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캘리포니아로 넘어가 금을 한번 캐보자는 청운의 꿈을 꾼 것이다.

헨리 조지는 1830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아주 가난한 하층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네 인근의 성공회 교회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2학년으로 중퇴한 것이 한평생 학력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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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경제진단] 토지공개념 개념과 유래, 사회주의 자본주의 경계… 헨리조지 부터 노태우 노무현 문재인 헌법개정안까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15세 때부터 배를 탔다. 미국과 인도를 오가는 원양선에서 말단 선원노릇을 했다. 그나마도 도중에 해고된 이후 식자공으로 겨우 연명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륙횡단철도 개통 소식을 듣고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행을 결행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도전은 녹록지 않았다. 금을 캐고 싶어도 캐낼 땅이 없었다. 적은 밑천으로는 광산에 접근조차 하기 힘들었다. 금이 나올 것 같은 땅은 대부분 소수의 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운 좋게 금을 캐내도 지주에게 임차료를 내고 나면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철도가 뚫린 이후 땅값은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철도역이 들어선 이른바 역세권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헨리 조지는 금 대박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인쇄공으로 취업한다. 우여곡절 끝에 한 인쇄소를 인수하게 된다. 그 인쇄소 시설을 토대로 187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사를 차렸다.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이라는 자그마한 로컬 신문을 만들어 발행인 겸 기자로 활약했다.

조지의 관심 분야는 경제 이슈였다. 그중에서도 토지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금을 찾아 대륙횡단철도를 탔던 수많은 서부개척자들의 꿈이 토지가격 상승 때문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특히 신랄하게 묘사했다.

헨리 조지는 신문 칼럼을 쓰면서 점차 경제사상가로 변해 갔다. 급기야 1891년에는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을 펴내기에 이른다.

이 책이 돌풍을 일으켰다. 출간 첫 해에 무려 300만부 이상 팔렸다. 당시의 인구수와 비교할 때 실로 대단한 판매부수다. 책만 많이 팔린 것이 아니라 ‘진보와 가난‘ 출간 이후 헨리 조지는 일약 저명한 경제사상사의 반열에 올랐다.

진보와 가난에서 헨리 조지가 특히 역점을 둔 것은 ‘풍요 속의 빈곤’이 야기되는 본질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잇단 기술진보와 경제성장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도래했으나 그 풍요 속에서도 여전히 가난하거나 이전보다 더 빈곤해진 계층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 원인을 규명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난과 진보라는 책의 핵심 내용이다.

헨리 조지는 그 책에서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구조적 모순의 원인이 바로 토지 지대에 있다고 갈파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부의 상당 부문이 경제적 지대라는 이름으로 토지 소유자와 독점 자본가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절대 다수 대중은 오히려 더 가난해 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이를 요즈음 경제학에서는 렌트(rent)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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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경제진단] 토지공개념 개념과 유래, 사회주의 자본주의 경계… 헨리조지 부터 노태우 노무현 문재인 헌법개정안까지


렌트는 여러 가지에서 야기되지만 헨리 조지는 그중에서도 특히 토지지대를 가장 나쁜 것으로 보았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절 토지가격과 철도 개통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면서 미국 토지 지대제도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금광개발을 위해 대륙횡단철도를 놓았는데 철도 개설 이후 땅값이 급격히 오르는 바람에 인근 지주들만 황재를 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토지 지대 때문에 금광개발업자와 노동자들은 오히려 더 못살게 되었다는 것.

헨리 조지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땅에 대해서만큼은 토지공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토지공개념 논의는 이 헨리 조지의 땅에 대한 지대해소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은 토지가치세로 집약될 수 있다. 토지의 가치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모두 세금으로 거두어들이자는 것이다. 토지가격이 오른 이유가 철도 개통 같은 외부효과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 만큼 그 불로소득을 환수하자는 것이다. 조지는 다른 세금은 전부 철폐하여 오로지 토지가치단일세 하나만으로 나라를 꾸려가자고 주창했다.

수많은 임차 상인과 무산 대중들은 조지의 토지가치단일세제 구상에 열광했다. 헨리 조지를 가난의 고리를 끊어 줄 메시아로 보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이를 당시 사람들은 ‘조지스트’라고 불렀다. 그 조지시트들은 연합노동당으로 몰려들었다. 연합노동당을 통해 의회를 장악한 다음 토지가치세를 정식으로 입법하자는 것이었다. 헨리 조지는 1886년 연합노동당 공천을 받아 뉴욕에서 출마했다. 선거 결과는 근소한 패배였다. 조지의 구상은 미국에서는 끝내 현실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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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경제진단] 토지공개념 개념과 유래, 사회주의 자본주의 경계… 헨리조지 부터 노태우 노무현 문재인 헌법개정안까지


헨리 조지를 엄밀한 의미에서 경제학자로 보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선행 경제이론에 대한 조예도 부족했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정통 주류의 경제학 교과서에는 헨리 조지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가 주창한 토지가치세라는 개념도 올라 있지 않다.

경제학 이론을 개척한 경제학자라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시한 경제사상가라는 쪽이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