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은 원래 중국한자 ‘福’으로, 풀어보면 (示) - (一) - (口) - (田) 이 됩니다. 이 뜻은 ‘한 식구에게 충분히 먹을 밭이 생긴다.’입니다. 부자의 부(富)도 거의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과 부는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음’의 다른 말이며, 상대에게 그리 되길 바라는 미담이라 하겠습니다.
과세(過歲)는 사전적 의미로 '설을 쇠다'입니다. 그래서 '과세나 잘했나' 하면 ‘설을 잘 보냈나?’ 또는 '설 제사상에 약주라도 올려놓았나?' 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 인사치고는 뭔가 어색함이 묻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세인사를 한 해 두 번해야 하는 어정쩡함이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인은 양력 1월1일과 음력설이 상존하기 때문이지요.
설은 음력으로 한 해가 시작하는 첫날, 즉 정월초하루의 명절입니다. 그런데 양력이 도입된 1896년부터 설 명절의 개념이 모호해졌습니다. 정부 시책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른바 ‘양력설’을 세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음력 명절을 즐겼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상황에 따라 새해 인사를 두 번씩이나 해야 하는 낯선 풍경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설에 대한 혼란은 ‘신정(新正·양력 1월1일)’과 ‘구정(舊正·음력 1월 1일)’이란 말을 만들어 놓았고, 설을 두 차례에 걸쳐 쇤다는 뜻에서 ‘이중과세(二重過歲)’란 말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을 1959년 모 일간지가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구정을 금한다. 치안 국에서 떡방아를 못 찧게 한다 해도 설은 역시 음력설이라야 ‘우리 설’같이 느껴지는 풍습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더구나 금년은 설이 일요일이라 학교도 쉬니 거리가 명절 냄새로 풍길 것이고 세배 돈의 저금통도 불어 날 것이다. 얼마 전만해도 그믐날 저녁때 어둠이 깃들면 동네청년들이 초롱을 해들고 떼를 지어 어른들께 세배 드리러 다녔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청년들이 어두운 골목길을 쏘다니노라면, 새로 빳빳이 풀을 먹인 바지저고리 스치는 소리가 동네 처녀들의 가슴을 공연히 설레게도 했었는데, 양력설과 음력설의 두 갈래에 끼여서 이제는 이런 모습도 그럭저럭 없어지는 것 같다.』
청마 유치환 시인도 1963년 내놓은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에서 ‘설 기분이 흐리멍덩한 이유는, 어쩌면 음력 과세와 양력 과세의 설날이 우리에게는 둘이나 있어 오히려 이것도 저것도 설 같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꼬집었습니다.
마침내 해방이 되고 이듬해인 1946년 2월, 우리는 모처럼 설다운 설을 만끽합니다. 당시 풍경 역시 신문기사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해방 후에 처음 맞는 구정, 이 날은 시내에 있는 각 관청, 회사, 학교, 신문사도 전부 쉰다. 조선 사람은 과거 이 구정을 맞이하려고 애를 썼으나 일본 제정은 구정 폐지를 강요해서 한 번도 우리 ‘설’이라고 즐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없는 쌀을 절약해서 적으나마 떡도 하고 밥도 해서 조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선조의 제상 위에 받쳐 놓은 각 가정의 구정의 아침은 퍽 명랑하다.」
그러나 이도 잠시.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의 설에 또 다시 찬물을 끼얹습니다. 양력 1월1일 신정만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음력설은 허용치 않는 종래 일제 강점기를 답습하지요.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인이 1%도 안 되었는데, 낯선 서양풍습인 ‘크리스마스’를 휴일로 지정하자 민심은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그리 했겠구나 생각은 들지만 우리네 정서를 외면했다는 마음은 금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또 다시 설에 대해 은근한 기대를 하였지만, 정부는 한 발 더 나가 ‘구정은 시간과 물자 낭비를 초래한다.’며 더욱 가혹하게 설을 탄압하였습니다. 설을 전후에 관공서, 은행은 물론이고 일반기업도 쉬지 못하게 압력을 가했지요. 그러나 50년의 탄압에도 굳건히 이어온 설 풍습을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고, 오히려 1967년 한 신문기사처럼,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관공서나 은행은 형식적으로만 문을 열었을 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습이었다. 법원에서도 재판이 열리지 않았고 경찰서에도 민원서류가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 서울역 등에는 귀성객이 몰려 혼잡했다.」 라고 전하며 휴일은 아니지만 사실상 휴일의 모습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눈칫밥 신세인 양 설 인사는 여전히 ‘과세 잘 보내셨습니까?’였습니다.
1985년 전두환 정부는 선심이라도 쓰듯, 음력 1월1일 하루를 휴일로 정합니다. 그런데 설이라는 고유 이름을 엉뚱하게 ‘민속의 날’로 둔갑시킵니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무식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정자들의 설에 대한 거부감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오늘 현재도 알쏭달쏭합니다. 아무튼 이 시기부터 새해 인사가 과세에서 차츰 복이나 건강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1989년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탄생시킨 노태우 정부(6공)에 비로소 설이란 말이 등장하고, 대통령령으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설 연휴 기간을 3일로 늘려 바야흐로 설다운 설이 정착됩니다. 개화기와 식민지, 산업화시대를 지나는 100년 동안 푸대접 받아온 설이 다시 부활한 것이지요. 이후 ‘과세 안녕하십니까?’라는 설 인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훈훈한 설 인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처럼 되찾은 설이 최근에는 명절 의미보다 단지 ‘노는 날’로 인식되어가고 있어 조금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